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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김한수의 오마이갓] ”명동성당보다 크게 짓자” 분단 전 북한 종교인들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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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광복 전 천주교 평양교구 주교좌 관후리성당을 펜화로 그린 작품. 일제 때 징발된 성당을 되찾은 신자들은 서울 명동성당보다 크게 짓기 위해 새 성전 건축을 시작했으나 공산당의 방해와 압력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펜화가 이승구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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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의 열성은 대단하여 서울의 명동성당보다 더 크게 짓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성당 터를 더 크게 잡았다.”

얼마 전 윤공희(98) 대주교가 구술한 책 ‘북한 교회 이야기’를 읽다가 눈에 들어온 대목입니다. 윤 대주교는 평남 진남포 출신으로 월남한 실향민 사제입니다. 앞서 인용한 문장은 해방 후 천주교 평양교구 신자들이 관후리 주교좌성당 재건 작업에 뛰어든 모습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일제가 징발해 빼앗겼던 성당 터를 광복 이후 조만식 선생 등의 도움으로 되찾은 후 새 성당을 건축하려 했던 것이지요. 당시 슬로건이 ‘우리 성당은 우리 손으로!’였답니다.

저는 ‘명동성당보다 크게 짓겠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정의채(97) 몬시뇰께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경평(京平)축구 시합을 하면, 평양 사람들은 승부는 안 물어봤어요. 그저 ‘저쪽 몇 명이나 부러뜨렀냐?’고 물었지.” 정 몬시뇰도 실향민입니다. 평북 정주가 고향이시고 윤 대주교와 함께 덕원신학교에서 공부하셨지요.

저는 두 분의 회고에서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한 북한 주민들의 자존심 혹은 서울과 남한에 대한 경쟁심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김일성 왕조는 북한 주민들의 이런 경쟁심을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이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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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장대현교회. 한국 개신교 교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1907년 평양대부흥이 일어난 요람이다.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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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무렵 북한 지역은 종교적으로도 자부심이 높았습니다. 천주교의 경우 관후리주교좌 성당을 비롯해 북한 지역에 57개 성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 지역의 천주교는 평안도(평양교구)는 미국 메리놀회, 함경도와 간도는 독일 베네딕도회가 맡아 선교했지요. 윤 대주교 책에선 진남포성당 신축 이야기도 나옵니다. 당시 기와로 지붕을 올린 한옥+양옥 절충형이었답니다. 가난한 신자들이 열성적으로 헌금해 1933년 축성식을 가진 이 성당은 이후 메리놀회가 평양교구에 짓는 성당의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윤 대주교를 비롯해 지학순(1921~1993)·김남수(1922~2002) 주교 등이 북한 출신이며 현 의정부교구장 이기헌(75) 주교도 평양 출신입니다.

개신교는 남한보다 북한 지역이 더 부흥했습니다. 감리교의 1903년 원산부흥운동, 장로교의 1907년 평양대부흥 등 한국 개신교 역사의 중요한 부흥운동의 중심은 북한 지역이었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평양대부흥의 요람 장대현교회의 사진을 보면 기와를 얹은 웅장한 한옥식 교회 건물뿐 아니라 그 앞을 빽빽히 메운 교인들의 모습에서 당시의 종교적 열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대부흥 이후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펜젤러·언더우드 선교사가 처음 둥지를 튼 것은 서울이었지만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은 급속히 개신교세가 확산했던 것이지요. 광복 후 서울 광나루로 옮겨온 장로교신학대도 마포삼열(사무엘 모펫·1864~1939) 선교사가 1901년 평양에 설립한 장로회신학교가 뿌리입니다. 평양대부흥의 산파 역할을 한 길선주 장로(후에 목사 안수) 등이 평양 장로회신학교 출신이었지요.

한국 개신교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한경직(1901~2000) 목사, 100세 넘어서까지 활동한 방지일(1911~2014) 목사를 비롯해 충현교회 김창인(1917~2011), 노량진교회 림인식(97), 광림교회 김선도(92), 소망교회 곽선희(89), 왕성교회 길자연(81) 목사 등이 북한 출신입니다. 또한 북한의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분단 후 종교자유와 살 길을 찾아 월남해 남한 개신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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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중앙대교당.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는 중앙대교당 건축을 이유로 모은 자금을 3.1운동에 사용했다. 북한 지역에 신도가 많았던 천도교는 분단 이후 교세가 크게 위축됐다. /고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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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공산화되면서 모든 종교가 피해를 입었지만 상대적으로 천도교의 피해가 막심했다고 합니다. 수운 최제우가 ‘동학’으로 창시한 천도교는 20세기에 큰 피해를 두 번 당했습니다. 첫번째는 3·1운동입니다. 당시에는 개신교나 천주교보다 천도교의 교세가 훨씬 컸다고 합니다. 당시 천도교는 중앙대교당을 짓는다는 이유로 전국 신도들의 헌금을 3·1운동 자금으로 썼다고 하지요.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을 받았지만 해방 무렵 북한 지역엔 150만명의 천도교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교인의 대다수가 북한에 거주했다는 것이지요. 이때문에 분단으로 천도교는 다시 한 번 교세가 크게 위축됐다고 합니다.

각 종교는 분단 전 북한 지역의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천주교는 평양교구장 서리를 서울대교구장이 겸하고 있고, 덕원자치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장이 겸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평양교구는 지금도 교구 소속 사제를 계속 양성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교는 지역 단위 조직으로 노회(老會)가 있는데요, 장로교 양대 교단인 예장합동과 예장통합 교단은 지금도 북한 지역의 명칭을 딴 노회가 있습니다. 예장합동은 전체 163개 노회 중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의 지명을 딴 노회가 41개에 이릅니다. 예장통합 교단 역시 69개 노회 중 평양노회 등 5개 노회가 있고요. 이들 노회는 원래 북한에서 월남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됐습니다만 현재는 남한에서 소속 교회들을 중심으로 노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원불교도 ‘평양교구장’을 두고 있습니다. 원불교는 분단 당시 38선 남쪽이었던 개성에 교당이 있었는데요, 지난 1994년 북한이 식량난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평양교구장을 신설해 박청수 교무가 초대 교구장을 맡았지요.

과거 남북관계가 좋았을 때에는 각 종교의 대북지원이 활발했지요. 그 가운데서도 특히 북한 출신 종교인들이 대북 지원에 앞장서곤 했습니다. 최근 북한에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다고 합니다. 힘없는 주민들이 더욱 고통받고 있겠지요. 북한이 인도주의적 지원을 받아들여 하루빨리 코로나를 극복했으면 합니다. 개신교 35개 교단이 속한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17일 논평을 내고 정부의 대북 인도적 지원 방침을 지지하며 “교계도 실질적 도움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길만 열린다면 이번에도 종교계가 북한 주민을 돕는 일에 앞장설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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