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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미국 분유대란이 부른 모유 수유 논쟁···“선택지 없는 엄마들, 죄책감 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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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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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6일(현지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에서 아이와 함께 마트를 찾은 한 여성이 텅빈 유아용 분유 매대를 바라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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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유대란이 모유 수유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고 뉴욕타임즈(NYT)가 보도했다. 아이들에게 심각한 위기가 될 수 있는 이번 사태에 대한 비난이 분유 시장의 독점 문제가 아니라 모유 수유를 하지 않는 엄마들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유대란은 코로나19로 인한 공급망 불안으로 분유 생산량이 줄어든 상황에서 지난 2월 분유 제조업체 애보트사의 리콜 사태가 겹치며 촉발됐다. 식품의약국(FDA)은 애보트사의 분유를 먹은 영유아들이 박테리아에 감염돼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입원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애보트사 3개 제품에 대한 리콜을 지시했다. 애보트의 분유 생산 중 절반을 담당하는 미시간 공장도 일시 폐쇄됐다. 이로 인해 미국 전역의 분유 품절률이 43%까지 치솟으며 영유아 자녀를 둔 미국 부모들은 분유를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다. 미국 분유시장을 지배해 온 애보트사의 제품 공급이 끊기자 시장 자체가 흔들린 것이다.

사상 유례없는 분유대란은 16일(현지시간) FDA가 유아용 조제분유 수입 규제를 완화하고 에보트 미시간 공장의 재가동을 결정하면서 해결 국면을 맞았다. 하지만 마트 매대에 다시 분유가 채워지기까지는 몇주 가량 더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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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타의 한 여성이 9개월 된 딸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간) 전국적인 유아용 분유 부족 사태에 대한 행정부의 대응을 강화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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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는 분유 부족 상황이 지속되면서 모유 수유을 하지 않는 엄마들이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아기에게 필요한 영양을 주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 모유 수유를 강요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소아과학회와 질병예방센터(CDC) 등 의료전문기관들은 생후 1세 이전 아이들에게 모유가 가장 좋은 영양 공급원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의 많은 엄마들은 의료적, 사회적 이유로 모유 수유를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아기가 특정 모유 성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선천적 요인부터 엄마가 갓 태어난 아이를 두고 일하러 나가야하는 경제적 이유, 산후 우울증과 연관된 감정적 어려움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다. 체질적으로 모유의 양이 적거나 항암치료 등 모유 수유와 양립할 수 없는 의학적 상황도 엄마들의 모유 수유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미국의 열악한 모성보호 정책도 부모들이 분유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주요인으로 지적 받는다. 미국은 선진국 중 유일하게 국가적으로 보장된 유급 육아 휴가 없는 나라다. 2020년 미국의 민간 부문 근로자의 20% 특히 저소득층 근로자의 8%만이 유급 가족휴가(출산·육아·가족간호 등을 목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휴가)를 쓸 수 있었다. NYT는 “대부분의 엄마들은 출산 후 6개월이 되면 모유 부족 문제와 집 밖으로 나가 일해야 한다는 요구에 부딪힌다”며 “그들에게 아이가 1세가 될때까지 모유를 먹이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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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샌안토니오에 사는 리비아 고든이 아들에게 먹일 분유를 타고 있다. 고든은 부족한 아기 분유를 구하기 위해 가족, 친구뿐만 아니라 소셜미디어를 통해 다른 엄마들에게도 연락을 취했다고 밝혔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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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에서 모유 수유는 오랜 기간 감정적으로 대립해온 문제 중 하나다. 최근 몇 년 간 미국에서는 부모에게 모유 수유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공중 보건 캠페인을 진행한 결과 1990년대 중반 58%였던 신생아 모유 수유 비율을 84%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엄마들은 모유 수유를 하지 않거나 지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성이 부족하다는 시선을 받고 있다.

미국 온라인매체 버즈피드는 “소셜 미디어에선 분유 부족 상황에 처한 부모들에게 마치 그들의 가슴이 우유팩으로 가득 찬 냉장고인 것처럼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식으로 아이들을 먹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명 가수이자 배우인 베트 미들러는 “모유 수유를 하라. 가격도 무료이고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다”는 트윗을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아기뿐만 아니라 산모의 정신 건강도 악화시키고 있다고 우려한다. 선택지가 없는 엄마들은 분유 부족으로 아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현실적 공포와 함께 스스로를 ‘나쁜엄마’로 느끼게 되는 심리적 불안이 가중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길링스 글로벌 공중보건대학원의 앨리슨 스터베 박사는 “사람들은 1형 당뇨병 환자에게 스스로 노력하면 인슐린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라며 “모든 여성이 아기가 필요로 하는 모든 모유를 생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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