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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공약집을 불태워라[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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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양영권 사회부장] 따지고 보면 공약이 갈등의 씨앗이었다. 지난 5년 문재인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공약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켜서인 경우가 훨씬 많았다.

1호 공약이었던 '적폐청산'을 위해 검찰 특수부를 강화했지만 이는 2호 공약인 '권력기관 개혁'과 충돌했다. 그 충돌은 대선에서 검찰총장 출신 야당 후보의 당선이라는 결과를 불렀다.

노동시간 단축 공약은 주52시간 근로제로 달성했지만 노동비용이 증가한 기업이나, 임금이 감소한 근로자들에게 원성을 샀다.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지키기 위해 출범 초기 급격하게 올렸던 임금은 소상공인·자영업자 문제를 악화시켰다. 이에 따른 근로자,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사회보험료를 지원하고 일자리안정자금을 편성했다. 이는 국가 재정난을 가중했다. 문제를 해결하려다 또다른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비정규직 감축 공약 수행을 위해 추진한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화 정책은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사태와 같은 '불공정' 논란을 키웠다. '제로원전 시대'를 열기 위한 원전중심 발전 정책 폐기, 즉 '탈원전' 공약은 에너지 비용 부담을 늘려 한전의 적자를 키웠으며, 수출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렸다.

역대 대선 최다 표차로 당선된 대통령이지만 후보 시절 제시한 공약을 지키는 걸 모두가 환영하지는 않았다. 국론은 둘로 쪼개졌고 '갈라치기 정치'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공약은 현상황에 대한 진단을 바탕으로 선출직 후보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이다. 정치인들은, 특히 야권 정치인들은 현 상황의 문제점을 과대평가해야 자신의 존재를 돋보이게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약 역시 과장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탈원전 공약만 보더라도 석탄과 석유와 가스를 사용하는 발전소를 줄여 지구 온난화 속도를 늦춘다는 원전의 이익은 과소평가한 결과다. 반면 원자력의 위험은 알코올이나 흡연의 위험보다도 훨씬 적은데도 과대평가됐다.

지형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다르다. 낮은 곳에서 올려다 볼 때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때 보이는 것이 다른 것처럼 야당 후보일 때와 대통령일 때는 보는 것이 다르고, 판단도 달라져야 했다. 하지만 '공약 달성이 선(善)'이라는 강박관념이 옳은 판단을 가로막는다. 더군다나 '급변'의 시대다. 나스닥이 하루에 5% 급락하는 것은 세상이 하루에만 5% 바뀌기 때문이다. 공약을 제시했을 때와 공약을 실현할 시점의 세상은 달라져있기 마련이다.

이제 문재인의 시대는 가고 윤석열의 시대가 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을 전후로 국정과제라는 이름으로 많은 공약을 구체화했다. 대선 당시 1호 공약이었던 소상공인 보상은 '최소 600만원'을 지급하는 소상공인 방역지원금으로 현실화했다. '광화문시대' 공약은 대통령실 용산 이전으로 변형해 달성했다. 앞으로 군인 월급 200만원, 기초연금 50만원, 여가부 폐지 등 나라살림에 부담을 주거나 편이 극명하게 나뉘는 공약들을 검토해야 하는데 과거 정권을 타산지석 삼아 '추진력'만을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대선 후보 때는 진영의 이익을 가장 앞에 뒀다면, 대통령이 돼서는 국민의 이익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약'이 걸림돌이 돼서는 안된다. 공약집을 공맹의 말씀이나 성서와 같이 받들 때 윤 대통령이 취임사에게 배격한 '반지성주의'가 싹을 틔운다.

'진격하는 것은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퇴각하는 것도 죄를 피하지 않는다. 오로지 백성을 보호하고 이익이 군주에게 부합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장수가 나라의 보배다.' 동서양 통틀어 최고의 병법서라 불리는 손자병법에는 주변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때 행동하는 방법이 나와 있다. 정책이 국민의 이익에 맞으면 움직이고 이익에 맞지 않으면 멈춰야 한다. 국민의 이익에 상충된다면 중요한 공약이라도 버리는 것이 진짜 용기다.

머니투데이



양영권 사회부장 indepe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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