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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이봉수의 참!] 성공한 대통령 되려면 반대자를 만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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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54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라이너스 폴링은 반핵운동을 하다가 매카시즘 광풍 속에 미국 연방수사국의 수사를 받고 상원 조사위원회에도 소환됐다. 미국 노벨상 수상자들을 위한 백악관 만찬이 있던 1962년 어느 날도 그는 백악관 앞에서 반핵시위를 벌였다. 만찬 시간이 되자 턱시도로 갈아입고 들어온 그를 케네디 대통령은 특별히 예우했다. “당신이 만찬에 참석한 데 경의를 표합니다.” 그래도 쓴소리를 멈추지 않은 폴링은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고, 소련과 맺은 부분핵실험금지조약은 케네디의 최대 업적이 됐다.

경향신문

이봉수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원장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과 잘 소통하고 싶다며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겼다고 한다. 비용·안보·교통 문제가 크지만 소통이라도 잘되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역행하는 조짐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경찰은 집시법 11조에 따라 대통령 관저 등에만 적용하던 100m 이내 집회·시위 금지 규정을 용산 집무실에도 적용하려 한다. 경찰은 법원의 제동마저 무시하고 대통령이 출근하지 않은 14일에도 집무실 100m 이내에 ‘경찰벽’을 쌓았다. 관저에는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집무실에만 허용한 것은 대통령도 사생활을 보호하되 공적으로는 민의를 경청하라는 취지다. 진정한 소통은 대통령이 반대자를 만나고 소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정보공개청구에 성실히 응하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는 데 있지, 저잣거리를 방문하고 뭘 먹었는지 대서특필되는 것과는 상관없다. 용혜인 의원은 집시법 11조가 국가기관의 편의를 위해 시민의 기본권을 희생시킨다며 폐지법안을 발의했다.

소통 역행 조짐 잇달아 진정성 의심

집회·시위를 신고하게 돼있는 제6조도 악용되고 있다. 일부 단체가 장소를 선점해 반대 단체의 집회·시위를 방해하는 일이 숱하게 벌어졌다. ‘집회 및 시위를 최대한 보장하고 위법한 시위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목적으로 제정된 집시법이 역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집회·결사 허가는 헌법에 위배되지만 하위법령과 행정기관의 법 운용에 의해 헌법정신이 유린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35번이나 ‘자유’를 외쳤다. 말의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집회의 자유’를 위해 집시법 일부 조항 폐지에 앞장서야 하지 않나? 다른 나라에서도 대통령 집무실이나 정부기관 근처는 단골 집회장인 곳이 많다. 미국 백악관은 집무실과 관저를 겸하지만 담장 바로 앞에서 집회·시위를 할 수 있다. 영국과 일본은 국가기관 주변 집회 제한 규정 자체가 없다. 민주주의 발상지인 영국 국회의사당 앞에는 구호를 써 붙인 장기농성자들 텐트까지 즐비해 ‘이런 게 민주주의’라고 말해준다.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시대에 대통령제가 잘 작동하려면 대통령이 기자를 자주 만나는 게 필수다. 내각책임제에서는 의회에서 총리와 야당대표가 늘 토론을 벌이니 언론이 중계만 하더라도 국민이 정치를 감시하고 참여하는 데 문제가 없다.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이 언론을 기피하면 제도 자체가 오작동한다. 정치와 행정이 비밀과 보신주의에 의존해 비효율과 독재로 치닫기 쉽다.

어떤 기자들과 어떤 자리에서 만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호적인 기자들과 술자리나 자주 갖는 게 아니라 껄끄러운 질문도 던질 수 있는 분위기가 돼야 한다. 미국 대통령 10명에게 모두 까칠한 질문을 한 백악관 최장기 출입기자 헬렌 토머스는 “기자들이 권력자 앞에서는 무례해도 된다”고 했다. 그는 “기자는 대통령에게 질문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비판 언론인과 자주 만나는 게 필수

김은혜 전 인수위 대변인은 윤석열 당선인이 ‘천막 기자실’을 찾아갈 때 미리 “현안 질문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러려면 기자실이 왜 필요한가? 정권 창출에 큰 공을 세운 조중동과 SBS 출신 일색으로 홍보진용을 짠 것도 좋지 않은 징조다. 선거 과정에서 비판을 많이 한 언론을 사법처리하거나 기자실 출입마저 제한하는 것은 아주 안 좋은 조짐이다.

지난 4월29일 한국갤럽 발표에 따르면 윤 당선인이 직무수행을 ‘잘못하고 있다’가 44%였다. 부정적으로 평가한 가장 큰 이유는 집무실 이전 35%, 인사 14%, 독단적·일방적 7%, 소통 미흡 5% 등이었다. 따지고 보면 모두 소통과 관련된 것들이다. 자신을 고무·찬양하는 이들만 만난다면 국민의 대통령이 아니라 한 정파의 수장일 뿐이다. 정권이 성공하려면 ‘아부꾼’ 대신 반대자와 비판언론인을 많이 만나야 한다.

이봉수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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