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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제정임 칼럼] ‘할아버지가 될 권리’와 차별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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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1월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지위 인정 소송을 낸 김용민(오른쪽)·소성욱 커플이 1심 선고 결과 관련 발언을 마친 뒤 눈물을 훔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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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30여년 전 노동부 출입기자단의 일원으로 강원도 한 탄광에 현장취재를 갔다. 작업복에 안전모를 쓰고 지하 수백미터 갱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누군가 혼잣말을 했다. “탄광 생긴 이래 여자가 들어온 일이 없다는데…. 붕괴사고 난다고.”

지금이라면 ‘근거 없는 차별 발언’이라고 정색했겠지만 당시엔 나를 빼고 전원 남성이었던 일행도, 나도 딱히 대꾸하지 못했다. 컴컴한 갱도를 거쳐 숨이 턱턱 막히는 지하 채탄장을 둘러본 뒤 진폐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퇴역 광부들을 만났던 그 취재는 탄광노동의 실상을 본, 무거우면서도 값진 경험이었다. 그러나 ‘여자, 사고’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 나머지, 이후 그 탄광에 혹시 사고가 나지 않았나 뉴스를 살폈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인권전문가인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지난 3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특강에서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을 받으면 정신적 고통과 모멸감을 겪을 뿐 아니라 ‘다른 데서도 같은 일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돌이켜 보면 내 또래 중에는 ‘첫 손님이 여자면 재수가 없다’며 승차를 거부한 택시기사나 문전박대한 가게 주인 때문에 위축된 경험을 한 이들이 있다. 시대가 바뀌어 노골적인 차별은 줄었지만 ‘여자가 어떻게~’라며 발목을 잡는 시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홍 교수는 흑인, 이주민, 성소수자, 장애인 등을 향한 차별도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차별을 받은 사람은 자기 정체성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스스로 자책하게 되고 (심한 경우)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군에 남을 수 있기를 바랐던 트랜스젠더 변희수 하사의 좌절과 죽음은 그 예일 것이다.

지금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을 요구하며 미류·이종걸 두 인권활동가가 40여일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그들은 차별을 생존의 위협으로 느끼는 이들을 대신해 목숨을 걸었다. 정의당과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4건의 차별금지법 제정안은 성별·장애·병력·나이·인종·학력·성적지향·고용형태 등 20여가지를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할 수 없도록 하고, 고용, 재화·용역의 공급, 교육, 행정 등 4개 영역의 차별은 제재 대상으로 규정했다. 이 법이 제정되면 ‘이런 행동은 위법’이라는 기준이 생긴다. 또 회사, 학교, 행정기관과 상거래에서 차별하면 법적 조처를 받게 된다. 이 법안은 국가인권위원회와 유엔 인권기구 등도 제정을 권고했다. 그러나 성소수자 조항 등을 이유로 보수 기독교단 등이 반대하자 정치권이 눈치를 보면서 2007년 첫 발의 후 15년째 표류하고 있다.

그사이 우리 사회의 차별과 혐오는 새로운 양상으로 위험수위에 올랐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중국인 출입금지’를 써붙인 음식점이나 ‘동성애자 출입업소’를 강조해 혐오 댓글을 폭발시킨 보도 등이 대표적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손바닥 색이 짙다는 이유로 그가 만든 음식을 ‘더럽다’고 폭언하는 등 이주민 혐오도 심각하다. 홍성수 교수는 최근 늘어나고 있는 ‘노키즈존’도 어린이라는 정체성을 이유로 무조건 출입을 금지하는 차별행위라고 봤다. 거대 정당 대표가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비난하고, 대통령이 후보 시절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했을 정도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로버트 라이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불평등이 커질수록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차별과 혐오가 심해지며, 정치가 이를 악용한다”고 말했다.

며칠 전 소성욱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이 한 인권단체를 통해 연락처를 알게 됐다며 “차별금지법 제정에 힘을 보태달라”고 간곡한 문자를 보내왔다. 그는 <오마이뉴스> 기고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에이즈 걸려 죽을 놈들 빨리 죽어라’ 등의 악담을 한다”며 “나의 꿈은 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썼다. 삶을 포기하려 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살 수 있다고, 끝까지 살아남아 증명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그의 간청대로, 168석의 민주당이 핑계 대지 말고 법안처리를 서둘러 주기 바란다. 사실 우리는 나이, 건강 등 여러 측면에서 인생의 어느 단계에는 모두 소수자, 약자가 된다. 소성욱씨가 ‘무사히 할아버지가 될 권리’는 우리 모두 차별 없이 살 권리와 같은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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