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늦은 나이에 배울 수 있는 건 선생님 덕분” 여성 만학도를 위한 일성여중고에서 열린 스승의 날 행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일성여자중고등학교에서 스승의 날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 학교는 어린 시절 학업을 마치지 못한 여성 만학도를 위한 학력 인정 학교다./구아모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10번을 가르쳐주면 11번을 까먹어요. 그래도 계속 알려주는 선생님 덕에 중학교 졸업장이 생겼고, 이젠 고등학생이에요”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일성여자중고등학교에서 만난 유애란(60)씨는 이같이 말했다. 일성여중고는 어린 시절 다양한 이유로 학업을 마치지 못한 여성 만학도들이 중·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할 수 있는 학력인정 평생학교다. 유씨도 이 학교 고등학생이다. 이날 스승의 날을 앞두고 유씨 등 재학생·졸업생들이 모여 ‘스승의 날 노래’를 부르고 선생님께 꽃을 전달하는 등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서울 동작구에 사는 유씨는 1962년 전남 나주시에서 태어났다. 6남매 중 장녀였던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14살에 가정부로 취직해 가족들을 부양했고, 이후 섬유회사 등을 다니다 결혼했다. 유씨가 번 돈으로 다섯 동생들은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초등학교 졸업장만 가진 채 평생 살아왔다.

그러던 중 2019년 건강이 안 좋아 병원을 찾았다가 두경부암 진단을 받았다. 투병생활을 하며 몸무게는 17kg가 줄었고, 피부도 벗겨졌다. 같은 병실에 있던 다른 환자가 새벽 2시에 세상을 떠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4번의 항암치료, 35번의 방사선 치료 끝에 회복된 유씨는 퇴원하며 ‘공부를 마저 하지 못하면 한이 맺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후 이듬해인 2020년 일성여중고를 찾았다. 2년제 과정이어 올해 초 중학교 졸업장을 땄고, 지금은 고등학생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는 “늦은 나이에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은 선생님 덕분”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학업을 중단한 탓에 누군가 “학교는 어디 나왔느냐”고 물어보면 기가 죽었다고 한다. 유씨는 “항상 을(乙)이 되는 기분이었다”며 “아이들 학교에서 부모님 학력을 물어보면 고졸이라고 거짓으로 적어 내기도 했다”고 했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다시 시작해 어려움도 많다. 컴퓨터 타자 연습 때는 손가락이 마비되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영어도 알파벳부터 다시 배웠다. 그는 “배운 내용을 자꾸 까먹었지만, 선생님들이 차근차근 다시 알려줘 배움의 재미를 느끼고 있다”고 했다. 유씨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수학이다. 그는 “수학 문제를 풀다가 답이 딱 떨어져 나올 때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토요일이었지만 이날 학교는 스승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온 학생들로 북적였다. 고등학교 1학년 3반 교실 칠판에는 ‘I LOVE YOU(당신을 사랑합니다)’ 모양의 풍선이 달려있었고, 교탁에는 ‘늘 사랑하고 감사합니다’라는 쪽지가 꽂힌 화분이 놓여 있었다. 대학교까지 마친 졸업생이 학교를 찾아 특강을 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일성여고를 졸업하고 명지전문대 사회복지과에 진학한 권숙인(58)씨는 이날 학교를 찾아 만학도들에게 “지금 선생님들이 가르쳐주시는 것을 잘 따라가면, 대학가도 아무 문제가 없다”며 “애들 키우고 살림하느라 희생했지 않느냐. 우리 꼭 잘 배워서 배운 것 써먹자”라고 했다.

행사가 진행되자 곳곳에서 눈물을 보이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 학교 영어 교사인 김인숙(60)씨가 칠판 앞에 서서 “선생으로서 뭐든지 다 해주고 싶은데, 잘 해주지 못해 항상 미안하다”며 “울지 않으려 했는데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이어 “공부도 재밌게, 시험도 재밌게, 재미로 배웁시다”라고 했다.

1952년 야학으로 시작한 일성여중고는 2000년 성인 여성을 위한 학력인정 2년제 학교가 됐다. 학교 관계자는 “형편이 어려워서, 혹은 여자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배움의 때를 놓친 여성들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한 학급 벽에는 ‘건강하자. 졸업하자. 엄마도 대학간다’는 급훈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구아모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