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 2월 16일 경향신문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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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된 것도 아니고, 안 된 것도 아니다.’ 마치 말장난 같은 이 표현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태도를 설명한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두 달 만에 박근혜 정부가 체결한 일본군 ‘위안부’ 합의 재검토에 착수했다. 약 5개월 동안의 조사 끝에 정부는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중대한 흠결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합의 결과 설립한 화해·치유재단은 해체했다. 위안부 합의 비판, 무효화 조치는 문재인 정부의 ‘역사관’, ‘적폐청산’의 대표적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났다. 일본군 ‘위안부’ 합의는 여전히 ‘적폐청산’의 대표적 성과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과의 관계가 나빠진 변곡점마다 위안부 문제를 언급했다. ‘피해자 중심의 해결’이라는 새로운 원칙도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흠결이 있다’는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거나 재협상하겠다는 뜻은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문 대통령은 지난해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국가 간 공식합의’로 인정했다. 국내적으로는 ‘흠결 있는 합의’, 국제적으로는 ‘공식합의’라는 인지부조화 상태가 만들어졌다.
‘반일’을 강조했던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인정한 만큼 다음 정부를 맡겠다는 유력 후보들도 이론이 있을 수 없다. 실제로 경향신문은 이재명·윤석열 캠프의 대일정책 실무자들을 만나 위안부 합의에 대한 입장을 확인했다.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 합의는 공식합의이고, 차후 한일관계 개선에 나서겠다”고 입을 모았다. ‘국가 간 합의’의 무게를 고려한 거시적 접근이었다. 하지만 ‘국가를 믿고 기다린 피해자의 기대’라는 무게는 누가 고려할 것인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피해자 중심의 해결’이라는 원칙이 무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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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윤석열 캠프의 대일정책 보도 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경향신문에 연락해 왔다. 5년 내내 ‘피해자 중심의 해결’을 강조한 정부는 정작 피해자에게 ‘해결 방향을 묻거나’, ‘시도 가능한 해결방안’은 한번도 설명하지 않았다고 했다. 유력 대선후보들이 과거사 문제에 ‘두루뭉술’한 답변만 반복하는 것에도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정부가 나설 수 없다면, 피해자가 직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는 막지 말라고 말했다.
이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외칠 때면 “정치적 목적, 배후가 있다”는 등의 비판이 쏟아진다. 올해 94세가 된 이 할머니가 야당의 사주를 받고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2월 16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이 할머니는 현 정부에 대한 실망을 드러내면서도 믿음은 잃지 않고 있었다. “우리 문 대통령이 꼭 나서줄 것”이라고 주문처럼 되풀이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첫 정부 기념식이 열린 2018년 8월 14일 문재인 대통령이 이용수 할머니의 손을 잡고 기념식이 열리는 충남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 안 모란묘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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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내내 ‘피해자 중심’ 해결을 강조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피해자의 의사를 묻거나 해결방안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많은 면담은 있었지만, 정부 측에서는 늘 ‘전달하겠다, 고려하겠다, 신중히 검토하겠다’고만 했습니다, 어떤 제안도, 해결방안도 제시하거나 설명해준 적이 없습니다. 위안부 합의 이후 별도의 후속 조치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의미 있는 결정을 내려주도록 목소리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해 위안부 합의를 공식합의로 인정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는 연락을 받았습니까.
“아니요. 합의를 인정했다는 사실조차 TV 뉴스,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 것 아니냐고 합니다.
“사실과 다릅니다.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인정하고 폐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은 계속 우리 정부를 향해 ‘한국이 해결책을 가져오라’며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합의 폐기나 후속 조치를 제대로 이행했다면 이런 적반하장식 태도를 보일 수 있겠습니까.”
-유력 대선주자인 이재명·윤석열 후보 측도 모두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국가 간 공식합의로 인정한다는 입장입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피해자 없이 한일 정부 관계자 몇몇이 몰래 한 합의를 어떻게 인정할 수 있습니까. 피해자들은 당시 합의에 즉각 반발했고, 국내외 주요 위안부 활동단체들도 모두 이 합의가 국제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며, 역사를 지우려는 시도가 숨어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도 이 합의가 피해 할머니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피해자 중심의 해결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대통령 취임 후에는 합의 폐기를 향해 가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지난해, 위안부 합의를 국가 간 공식합의로 인정해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위안부 합의를 토대로 한일관계를 진전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인권 문제를 해결하려면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정확한 진단을 내려야 합니다. 잘못된 진단을 토대로 나온 처방은 결코 병을 제대로 고칠 수 없습니다.”
-피해 당사자로서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어떤 부분이 문제라고 생각합니까.
“일본과 협상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들을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일본이 반인륜범죄, 전쟁범죄의 책임을 인정한다는 말은 발표 문구 어디에도 없습니다. 양국 간 서명한 공식 합의문서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위안부에 대해 성노예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등의 이면합의만 남았습니다. 일본의 태도를 보면, 정말 이 합의를 국가 간 합의로 존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외무성 장관이었던 기시다 일본 총리는 ‘우리가 잃은 것은 10억엔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일본이 위안부 합의를 통해 무엇을 사과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정부는 이미 유효하지도 않게 된 합의를 뒤늦게 ‘국가 간 합의로 인정’했습니다. 이 합의를 바탕으로 뭔가 해결할 수도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데, 오진에 근거한 최악의 처방입니다.”
-지난 2월 15일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꼭 1년 전,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정부 및 국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나 유엔 고문방지협약(CAT)에 근거한 회부를 촉구해 왔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정부 및 정치권 관계자들을 만났지만, 그 누구도 책임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이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대통령뿐이라는 판단하에 청와대 앞까지 가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게 됐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CAT 회부를 요청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 더 이상 일본이 진심으로 사과하리라는 환상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피해자들은 거의 다 돌아가셨고, 나도 이제 아흔넷입니다. 일본이 태도를 바꾸기를 기다리기보다 일본이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역사왜곡을 못 하도록 권위 있는 국제기구의 명확한 판단을 받고자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나날이 도를 높여가는 일본의 역사왜곡을 막고 후대에 올바른 역사를 가르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의 응답은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일본의 태도가 완강하다는 설명 외에 별다른 논의는 없었습니다. 고문방지협약 회부는 일본의 동의가 없어도 한국 정부가 유엔에 요청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를 한국 정부가 집행하지 않고 외면한다는 건 인권을 유린당한 자국민을 대변해야 할 국가의 책임 회피로 명백한 ‘직무유기’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 2월 16일 경향신문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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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도 도움을 요청했습니까.
“지난주 만난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와 그 자리에 동석한 이수진 의원이 지금까지 만난 민주당 의원 중 가장 구체적으로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이 의원은 대표로 결의안도 발의했습니다. 현재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지지의사를 밝힌 분은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해결방안을 제시한 적은 없습니다. 국민의힘 쪽에서는 김기현 의원이 여러 차례 만날 때마다 지지의사를 밝혔고, 양금희 의원이 고문방지협약 회부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냈습니다. 이번에 만난 이준석 대표는 문재인 정부의 실책을 비판하면서 지지한다고 했지만, 여가부 폐지 공약을 철회하라는 요청은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외에 하태경 의원이 국회인권포럼 대표로서 간담회를 개최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문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까.
“문 대통령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피해 할머니들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은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국민도 좀 지켜주면 좋겠습니다. 이제 13명 남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시도라도 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재명·윤석열 두 유력 후보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진단을 바로 해야 올바른 처방이 나옵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냉철한 판단을 통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주셔야 합니다. 일본은 ‘위안부’ 등 전쟁범죄를 지우려고 장기적이면서도 체계적인 방법으로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국의 일부 극우주의자들도 이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고문방지협약에 회부하려면 대통령이 결정해 외교부가 서신을 보내줘야 합니다. 이조차 하지 않겠다면, 대체 어떤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풀겠다는 건지 너무 답답합니다.”
-일각에서는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할머니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윤미향 의원 문제 이후 여러 말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윤미향 의원에 관해서는 사실, 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속여도 ‘그런가보다’만 했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다 알지도 못합니다. 언론이 물어와 직접 겪은 ‘식사 문제’, ‘소외 문제’ 등 몇가지를 이야기한 것뿐인데 내 뒤에 보수세력이 있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모략이 나오더군요. 이러한 왜곡과 관계없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해서 싸울 겁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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