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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땅을 파도 아버지의 시신은 나오지 않았다 [박만순의 기억전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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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때 가족을 잃은 이들의 생존법... 여주 차경자·재경 자매와 김규석·박수빈 부부

"경자, 너 오늘도 월사금 안 갖고 왔냐?" "...." 차경자(1943년생)는 매의 눈을 한 선생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친구들의 눈초리와 마주칠까봐 창피하기도 했다.

소녀는 훌쩍이며 집에 왔지만 엄마에게 월사금 얘기는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삯바느질로 그날그날 생활하는 엄마에게 또 하나의 고통을 줄 수는 없었다. 저녁 내내 냉가슴을 앓은 경자는 무슨 결심이 섰는지 종이와 연필을 꺼냈다. '선생님께~'로 시작된 편지는 자기 가족의 사연과 월사금을 왜 제때 못 내는지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채워졌다. 편지를 쓰면서 아버지와 엄마 생각으로 눈물이 샘솟 듯했다.

차경자는 새벽까지 쓴 편지를 들고 다음날 아침 조회가 끝나고 교무실로 갔다. "선생님 이거요." 경자가 건넨 편지를 묵묵히 읽던 선생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랬구나...."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졸업할 때까지 사친회비 걱정하지 마라." 소녀의 가슴에 얹혀 있던 바위가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밤새 쓴 경자의 편지에 눈물을 흘린 선생님은 경기 여주군(현 여주시) 여주초등학교 이범학 교사였다. 차경자가 여주초등학교 2학년 때이던 1951년의 일이었다.

호미 들고 향교 뒷동산에 갔던 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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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자 차경자(왼쪽), 차재경 자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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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년 전인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해 10월 차경자는 엄마와 함께 아빠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 "경자야, 호미 챙겨라." 경자는 호미를 들고 엄마를 쫓아갔다. 집 나이 8세의 경자는 아버지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그저 호미를 챙기라고 하니 들고 따라갈 뿐이었다.

엄마 등에는 동생 재경(1947년생)이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소달구지를 타고 가던 옆집 할아버지가 "경자야. 여기 타거라"고 해, 모녀는 그나마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서두른 김정희·차경자 모녀는 아침 8시경에 여주군 여주읍 여주향교 뒷동산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와 있었다. 남성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 땅을 팠고, 시신이 나오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가족인지 확인했다.

곳곳이 울음바다였고, 삽과 괭이를 든 이들의 손놀림은 더욱 바지런해졌다.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한 김정희의 속은 바싹바싹 탔다. 삽과 괭이를 든 이들의 손은 날랬지만 자신들은 기껏 호미로 하니 더딜 수밖에 없었다. 집에 사내가 둘이 있었지만, 큰아들은 의용군으로 끌려갔고, 작은아들은 집에 없었다.

김정희 모녀의 땅파기는 오후까지 이어졌다. 경자의 배는 등딱지에 붙은 지 오래였다. 그렇지만 엄마에게 '배고프다'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엄마는 동생까지 엎고 있었다. "경자야. 그만 가자." "엄마. 흙이라도 가져 갈까?" "...." 8살짜리 아기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기특했지만, 맨흙은 아무 의미가 없기에 김정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울음을 꾹 참았던 김정희는 집에 와서야 대성통곡을 했다. 남편 차용환은 한국전쟁 군·경 수복시에 "잠시 피난 가 있으라"는 친구들의 권유에 서울로 피신했다. 그런데 고향의 처자식이 궁금해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가 여주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치안대가 그를 연행했고 이후 학살되었다. 1950년 10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미군부대에 취직하다

"미군부대 취업하려면 영어를 알아야 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데?" 경자는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마을 언니에게 물었다. "내일 아침까지 알파벳을 전부 외워." 그날 밤 경자는 알파벳 26자를 외우느라 꼬박 밤을 새웠다. 다음날 여주군 능사면 미군부대의 미군은 그녀에게 "알파벳을 써 보시오"라고 했다. 주저없이 술술 쓰니 합격이었다. 18세 차경자는 미군부대에서 식당 일과 청소를 하게 됐다.

아버지와 큰오빠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김정희의 삯바느질로 먹고 살았다. 차경자의 동생 차재경도 늘 배가 고팠다. 다행히 인쇄소에 다니는 집안 아저씨 덕분에 도화지 같은 학용품은 걱정하지 않았다. 재경은 고아원(여광원)의 친구들에게 도화지를 나눠 주고 대신 친구들에게 빵을 얻어 먹었다.

언니와 마찬가지로 차재경은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고 소창공장에 취직했다. 하급 선염사를 사용해 기저귀를 만드는 곳이었다. 얼마 후에는 서울 천막사에 취업했다.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불행이 닥쳤다. 1980년 출근하던 남편이 무면허 차에 치여 장애인이 되었다. 이후 그녀는 식당을 차려 악착같이 장사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를 했다. 천주교에서 독거노인들을 위해 운영한 '베로니카집', 장애인 시설인 '나팔집', 중증장애인 목욕봉사를 하는 '평화의집'에서 활동했다. 또한 보리사 신도회장도 10년간 했다.

장애인인 남편도 돌보면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애쓴 것은 한국전쟁 때 억울하게 학살된 아버지와 행방불명된 오빠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힘든 이들을 돌보면 그들의 한을 풀 수 있다고 믿는다.

3천 세대 1만 명이 살았던 '도인촌'

1951년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부산역에 내린 김규석(1946년생)은 모든 게 신기했다. 그때까지 김규석은 자신이 태어난 여주군 흥천면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기차를 탔는데 내리고 보니 부산이었다.

김규석의 가족은 부산시 감천동 태극도 도인촌에 짐보따리를 풀었다. 온 가족 입이 쩍 벌어졌다. 산비탈에 계단식 집이 죽 늘어서있는, 이른바 '달동네' 감천동이었다. 헉헉거리며 산꼭대기에 올라가 부엌이 딸린 방 한 칸 집에 짐을 풀었다. 일요일에 교회를 갔는데, 태극도 성전이 궁궐 같아 또 다시 입이 벌어졌다. 수천 명이 되는 태극도 신도들이 모여 예배를 보았다. 이후 1958년에는 3천세대 1만명이 거주할 정도로 태극도는 성장했다.

김규석 집안은 할머니 최춘식의 주도로 부산 도인촌으로 이주했다. 최춘식의 태극도 신앙은 거의 광신적이었다. 최춘식은 왜 이렇게 신흥종교인 태극도에 몰입했을까? 한국전쟁기에 자식을 둘 잃은 그녀는 가슴에 한이 맺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빨갱이 가족'이라고 손가락질했다. 당시 교회에는 반공주의가 횡행했기 때문에 그녀는 교회에 다닐 수도 없었다. 그러자 태극도 아래로 한국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처럼 1950년대 중반 대한민국에서는 신종교(신흥종교)가 엄청난 기세로 성장했다.

전쟁의 상처 지닌 부부

최춘식의 아들이자 김규석의 아버지 김영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50년 10월 쫓겨갔던 대한민국 군·경이 수복하자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 김영환(1925년생)은 이포 친구집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는 치안대에 검거되었고, 남동생 김정환(1928년생)도 보리밭에서 일아하다가 여주경찰서로 연행됐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김영환은 유서를 작성했다. '내 동생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다 내 책임이다'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두 형제 모두 불법적으로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다. 두 아들이 죽은 장소를 몰랐던 아버지 김석환과 어머니 최춘식은 마을 앞 읍뜰을 헤맸다.

결국 남편 김석환마저 세상을 떠나고 최춘식은 며느리와 손주를 데리고 여주를 떴다. 김영환의 아내 박옥분은 부산에서 살 궁리를 해야 했다. 그래서 '동동구루무', 즉 화장품 장사를 시작했다. 아들 김규석이 완월동에서 도매로 물건을 가져오면 박옥분이 구루무를 병에 담아 마을을 다니며 팔았다. 하지만 외상이 많아 남는 게 없었다. 그러던 차에 1960년 큰 홍수가 부산을 덮쳤고 박옥분은 외상값도 받지 못하고 물건도 모두 날렸다.

이후 김규석 가족은 각개약진했다. 박옥분은 다시 여주로 가 농사를 지었고, 규석의 누나들은 공장에 취업했다. 규석은 구두닦이를 시작으로 청호(개똥쑥), 먹통(목통), 천남성 등의 약초를 캐 한약방에 팔았다. 공장과 건축 현장에도 부지런히 다녔다.

1972년에 결혼한 그의 부인도 전쟁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부인 박수빈(1954년생)이 태어나기 4년 전, 그녀의 숙부인 박금석(1917년생)과 박광철(1920년생)이 부역혐의로 학살되었다. 여주군 북내면 녹수골에 살던 박금석, 박광철 형제는 군·경 수복 시기에 큰형 박백산을 찾으러 가다가 큰길가에서 이유 없이 총살당했다. 그들은 북한군 점령시절 부역활동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국전쟁기에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이 만나 부부가 되었다. 그들은 결혼 이후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상처를 보듬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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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자 김규석(왼쪽), 박수빈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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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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