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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설 앞둔 ‘나홀로’ 중장년 고시촌 풍경…한켠에 자리잡은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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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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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의 모습. 장인국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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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촌’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골목길을 굽이굽이 따라가다보면 ‘원룸텔’, ‘고시원’ 등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이름은 ‘대학동 고시촌’이지만 대학생도, 고시생도 아닌 중장년들이 지난 26일 무료로 나눠주는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길벗사랑공동체 ‘해피인’에서 하루 평균 120~130명분을 준비하는 도시락을 받기 위해서다. 여기서 도시락을 주로 타 가는 이들에게 설 명절은 더욱 고달픈 시기다. 가족과 함께 살 수 없는 처지가 명절엔 더욱 쓸쓸하게 느껴져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곳이 ‘빨간 날’ 문을 닫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 2017년 처음 도시락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하루 4~5명분만 준비했지만, 어느새 100명분을 훌쩍 넘었다고 했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보다 3~4배 늘어난 분량이다. 이곳에서 포장된 순댓국 한 그릇을 받아들고 집으로 향하던 강모씨(43)는 “요즘은 무료급식소가 많이 없어졌는데 이런 곳이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라며 “코로나 때문에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도 금방 잘리는 경우가 많다. 그저 견디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50여m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스타하우스 고시원’ 간판을 단 건물이 눈에 띈다. 이 근방에서 홀로 사는 중장년들을 위한 쉼터 ‘참 소중한…’이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다. 지난해 2월부터 쉼터를 운영하고 있는 이영우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신부는 이날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고시촌 주민들에게 전달할 선물을 포장하고 있었다. 설날도 혼자서 보내야 하는 이들을 위한 선물 꾸러미에는 즉석밥과 컵라면이 세트로 담겨 있었다. 이들이 준비한 따뜻한 명절 선물 130여개는 28일 모두 다 지급됐다고 한다. 쉼터 관계자는 “쉼터에 오가는 분들은 명절에도 고향에 못 가거나 안 가는 분들이 대부분”이라며 “이번 설 연휴에 도시락 무료 급식이 이틀간 운영이 중단되기 때문에, 굶는 분이 계실까 밥과 라면으로 선물 꾸러미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쉼터도 평소 공휴일에는 문을 닫지만, 이번 명절에는 31일과 다음달 2일 오후 문을 열기로 했다. 두 차례에 걸쳐 영화 상영 시간을 마련했는데, 혼자인 이들이 명절에 더 외로울까봐 ‘영화라도 같이 보자’는 취지에서 준비했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홀로 살아가던 중장년들은 이 쉼터에서 비슷한 처지의 ‘1인 가구’들을 만나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주고 있다. 대학동 고시촌에서 9년째 살고 있다는 주민 최모씨(37)는 무명 배우인 친구의 사진을 찍어주고 싶어 사진 강좌를 알아봤지만 비싼 수강료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4월 무료 사진 강좌를 연다는 소식을 접하고 찾은 쉼터와의 인연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6년 잘 다니던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된 이후 최씨는 늘어난 이자 부담에 3년여 동안 배송기사로 물류업체 2곳에서 일했다. 일주일 중 일요일 오전이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는 그는 결국 밤낮 없이 일하던 중 쓰러졌고, 관리자는 그를 사실상 사직 처리했다. 최씨는 “코로나19가 터지고 나서는 일자리가 안 구해졌다. 오늘도 이력서를 냈지만 연락이 없다”며 “한 글자에 4원씩 받고 글을 쓰는 아르바이트 같은 일들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재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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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대학동에 있는 ‘참 소중한…’ 쉼터. 장인국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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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는 비좁은 고시원에 갇혀 있는 이들 삶의 반경을 넓혀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쉼터에서 1인가구 중장년 자조자립모임 ‘소행모’를 이끄는 장인국씨(60)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으면 우리가 사는 이곳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으로 쉼터를 가꾸고 있다. 2년여 전 대학동 고시촌에 ‘재입성’했다는 그는 “다시 들어 온 첫 6개월 동안은 극단적 선택만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다 쉼터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준 덕분에 방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장씨는 “이 사회의 ‘언더독(사회적 약자)’인 독거 중장년들이 밀려 들어온 곳이 이 동네”라며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정신이나 신체 건강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을 어떻게 끌어내 같이 활동할지가 가장 큰 숙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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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구 대학동에 있는 ‘참 소중한…’ 쉼터에서 진행했던 고시촌 거주민들 간의 자조자립 모임. 이영우 신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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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혼자 사는 길을 택했지만, 홀로 살기 때문에 또 다른 많은 어려움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천주교 빈민사목위원회가 2020년 7~8월 한국도시연구소와 함께 10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대학동 고시촌 거주가구 실태조사’를 보면, 월평균 소득이 100만원 이하인 경우가 59.8%에 달했다. 가족·이웃과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이웃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다’는 답변이 35.2%, ‘가족과 연락을 아예 안 한다’는 응답도 20%였다.

그러다보니 독거 중장년들은 고독사의 위험에 노출돼 있고, ‘노년 빈곤’으로 이어지기도 십상이다. 이 고리를 끊어내는 데에는 이 쉼터 같은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하지만 쉼터마저도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안정적 운영이 위협받고 있다. 정기적으로 진행되던 강좌나 자조모임이 중단되거나 띄엄띄엄 열리는 일이 잦아졌다. 쉼터에 대한 공적 지원이 부족해 대부분의 운영 비용을 기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한계다.

최은영 도시연구소 소장은 “고시원에 거주하는 중장년층이 많아지면서 고시촌은 빈곤계층 거주지로서의 특성이 강해지고 있다”며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중장년 1인가구를 위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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