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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쇠퇴한 '김포의 명동'... 예술을 입다 [걷고 싶은 길 가고싶은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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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김포 백년의 거리
한국일보

1970~80년대 김포지역 최대의 상권으로 자리매김한 북변중로 모습. 좁은 왕복 2차로에 노선버스가 다수 운행하지만 번화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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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김포시 북변동 복판을 지나는 북변중로. 왕복 2차로를 쉼 없이 오가는 빨강, 파랑, 초록색의 버스를 보고 있노라면, 번잡한 시내임에 분명하지만, 정작 도로변 인도로에는 인적이 뜸하다. 또 키 작은 건물들이 길 양쪽으로 도열한 모습이 1970년대 서울의 어느 귀퉁이를 닮기도 했고, 한적한 시골 읍내와도 분위기가 비슷하다. 점포에는 ‘임대’ 안내문이 붙어 있어 번화가라는 이미지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시계를 뒤로 돌리면 이 곳은 한때 김포 최고의 번화가였던 곳이다. 주민들은 북변중로를 ‘신작로’라 부른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군수물자 운송을 위해 새롭게 길을 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로와 맞닿는 건물 뒤쪽은 신작로가 뚫리기 전 마을을 관통한 ‘구작로’가 있다.

'김포의 명동' 북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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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작로에 위치한 김포인쇄사. 현재는 타투숍으로 운영되지만 간판 등은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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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명이 아닌 옛 지번으로 치면 ‘북변중로’는 김포시 북변동에 속한다. 북변동은 해방 직후부터 김포 최고의 도심이었다. 이후 1970년대 군청과 우체국이 들어서고, 그 주변에 점포와 술집, 다방 등이 들어서면서 70, 80년대 김포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북변동 일대에 40년 이상 된 오래전 상점들이 유독 많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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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장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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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된 도장집 ‘성심당’부터 2대째 보양식을 전문으로 하는 ‘털보식당’, 시아버지와 며느리, 손주까지 3대에 걸친 ‘김포약국’, 어머니와 딸이 함께 하는 ‘영미미용실’ 등이 대표적이다. ‘박천순대국’, ‘수연식당’, ‘오달통분식’, ‘무지개분식’, ‘닭발천국’ 등도 30년 넘게 북변동을 지키고 있다.

무심코 흘려 보낼 수 있는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들이 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를 귀띔한다. 지역번호를 제외한 ‘984-2OOO’이라고 적힌 번호 뒤 세 자리가 북변동에서 전화를 개통한 순서라는 것이다. 김포약국 뒷자리 번호는 2092번, 성심당은 2138번이다. 김포에서 92번째, 138번째로 전화를 개통했다는 뜻이다.

최고의 이 상권은 1990년대 도시 팽창과 본격적인 산업화로 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북변동은 더욱 발달했다. 시청이 주변 도심으로 이전하면서 세가 기울 법도 했지만, 그 자리에 경찰서가 들어서면서 ‘최고 상권’ 명맥을 유지했다.

터미널 없어진 북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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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피티로 꾸민 구작로 옛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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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경찰서마저 신도시로 이전하면서 북변동은 기울기 시작했고, 2002년엔 시외버스터미널이 밖으로 나가면서 번성했던 북변동은 꺼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북변 주민에게 김포시외버스터미널은 단순히 '서울행 버스 타는 곳'이 아니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쇼핑을 하고 식사를 하는 공간, 사람들을 만나는 만남의 광장이었다. 북변동 주민들은 북변동 상권 쇠퇴가 관공서 이전도 이전이지만, 터미널이 밖으로 옮겨갔기 때문으로 믿고 있다. 그들에겐 버스터미널을 붙잡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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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백년의 거리의 초석이 된 'ㅂㅂ 갤러리' 전경. 70-80년대 건물 외관이 그대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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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퇴한 북변중로는 회복은커녕 한때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2009년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됐을 때다. 당시 북변동이 모두 철거돼 아파트와 상가시설 등이 들어온다는 말에 주민의 이탈은 더욱 가속화했다.

하지만 재개발을 반대하는 주민과 개발 차익을 노린 외지인 중심의 찬성 의견이 팽팽히 맞서면서 재개발은 흐지부지됐다. 식당과 서점 등 점포가 하나둘씩 비어가고, 외지인들의 관심도 줄어들면서 북변동은 점차 늙어갔다.

화려하진 않더라도 그럴싸한 네온, LED 간판 하나 없는 북변동. 김포의 명동으로 까지 불리던 최고의 상권은 30여 년 만에 죽은 동네, 다니기 무서운 동네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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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오픈해 김포의 교보문고로 불리던 해동문고 건물. 현재는 '해동 1950' 카페로 바뀌어 북변로 변신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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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사라지고 말 것 같은 북변동이었지만,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한 줄기 불었다. 사회적기업 '어웨이크' 여운태 대표 '추억'이 그 시작이다. 그는 당초 2005년부터 북변동에 터를 잡고 북변동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는 “내가 살려면 북변동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동료 예술인들을 모았다. 작업실, 공연장 등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북변동 주민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다. 재건축·재개발 등으로 지친 주민들에게 그는 '허세 부리는 사람'일 뿐이었다.

여 대표는 “김포 태생임에도 김포를 제대로 모른 상태에서 무작정 시작한 것 같았다”며 “그걸 깨달은 뒤 ‘지역살이’를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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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화된 '구작로'에 위치한 한 철문에 그려진 그라피티 앞에서 '김포청년' 여운태 어웨이크(사회적기업) 대표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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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변동에 사무실을 차리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북변동에만 있었다. 그 생활을 통해 ‘북변동의 쇠락이 터미널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1950년 문을 열었던 해동서점이 '김포의 교보문고'였다는 점도 알게 됐다.

이어 자신이 졸업한 김포초등학교가, 친구들이 다녔던 김포성당과 김포제일교회가, 김포 5일장이 반경 500m 내에 터를 잡고 자신과 주민들보다 먼저 자리매김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북변동의 새로운 바람, 2015년 열린 ‘백년의 거리 축제’가 시발점이 됐다. 여 대표는 ‘백년의 거리 축제’를 북변동 쇠퇴의 가속화와 주민에게 상실감을 준 옛 터미널 부지에서 개최했다. 북변동 마을 주민들의 머릿속에 간직한 장소에서의 축제는 그들의 마음을 열기에 충분했다.

예술 입은 백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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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퇴한 북변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고 있는 '게으른 정원' 독립서점 내부 모습. MZ세대, 특히 여성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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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거리 축제 후 주민들도 상인들도 북변동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빈 점포를 그대로 방치하던 건물주들이 저렴한 임대료로 청년 작가들에게 임대하기 시작했다. 청년들도 을지로 뒷골목 같다며 반기는 분위기다.

신작로인 북변중로 중간 지점에 위치한 2층 건물의 안경점과 상가들은 북변동의 자발적도시재생의 시발점인 갤러리로 탈바꿈했고, 김포의 교보문고로 불렸던 ‘해동서점’은 ‘해동 1950’ 카페로 변했다.

‘해동 1950’은 쇠퇴하고 슬럼화된 탓에 건물 외관이 1970~80년대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데 현재 가장 ‘핫’하고 ‘힙’하다는 서울 성수동 ‘블루보틀’ 외관과 같은 갈색 타일을 사용해 인기가 많다고 한다. 특히 카페 앞에는 김포시 제1호 우체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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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 1950' 지하에 최고의 상권으로 자리매김하던 당시 각 점포 등에서 사용했던 물품을 한곳에 모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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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정원’이라는 독립서점도 있다. 특정 계층을 겨냥한 서점으로 2030 여성 고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신작로의 변화처럼 구작로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1953년 구작로에 문을 연 김포인쇄사는 한 청년작가에 의해 타투숍으로 변했다. 인쇄의 대상이 ‘종이’가 아닌 ‘사람’에 착안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간판과 건물 외관을 그대로 둔 채 내부 인테리어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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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 1950' 카페 앞에 세워진 북변동 제1호 우체통. 우체통에 1이라고 써 있다. 실제 운영되지 않지만 옛 위상을 위해 철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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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지역 첫 번째 다방인 ‘이야기 다방’ 자리는 ‘영에이엠’이라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영에이엠’ 명칭은 ‘0과 오전, 즉 자정’을 의미하거나 ‘시작’, ‘젊음’의 뜻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주문식 샌드위치 점포인 서브웨이식 김밥 천국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재료를 골라 주문하면 즉석에서 요리를 해준다. 20여 년 넘게 떡볶이 가격이 1,500원인 곳도 있다. 생선과 양념게장은 있지만 고기가 없는 한정식 집도 있다.

여 대표는 “서울 목동에 사는 아이들은 아파트와 학교, 상가 건물 외에는 보는 것이 없다”며 “김포에 아파트를 더 이상 짓지 말고 다양한 건축물을 세워 아이들에게 골목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임명수 기자 s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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