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설왕설래] 무령왕릉과 건업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세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왕과 귀족의 무덤이다. 유물·유적이 적은 백제의 경우 무덤이야말로 백제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고구려 계통 이주민이 세운 백제는 한성시대에 고구려 무덤 양식을 계승해 피라미드 형식의 돌무덤을 만들었지만,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뒤에는 벽돌무덤으로 바뀌었다.

1971년 충남 공주 송산리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이 대표적인 벽돌무덤이다. 무덤 폐쇄 후 1442년 만에 도굴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로 발굴됐다. 무덤 내부의 지석(誌石)에 새겨진 ‘백제 사마왕(斯麻王)’이란 글자로 인해 무령왕릉임을 알게 됐다. 5000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백자 등잔 등 중국에서 수입한 자기들도 발견됐다. 백제사 연구가 진일보하는 전환점이 됐다.

어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무령왕릉과 왕릉원(송산리 고분군) 29호분의 입구를 폐쇄하는 데 사용한 연꽃무늬 벽돌 옆면에서 ‘조차시건업인야(造此是建業人也·이것을 만든 사람은 건업인이다)’라는 글자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건업은 지금의 난징(南京)이다. 5∼6세기 중국 남조(南朝)의 도읍지였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이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뒤 건업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이후 동진(東晉)·송·제·양·진(陳)까지 이곳에 도읍해 눈부신 귀족문화를 꽃피웠다. 육조고도(六朝古都)라고 불린다.

앞서 29호분 인근 6호분에서는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양나라 관영 공방의 기와를 본보기로 삼았다)’라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발견된 바 있다. 이번에 확인된 글자는 백제 벽돌무덤이 남조의 영향을 받았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 남조의 기술자들이 벽돌 제작뿐 아니라 벽돌무덤 축조에도 참여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고 한다.

무령왕릉의 관에 쓰인 나무는 일본에서 가져온 금송(金松)이다. 무령왕 때 백제가 중국·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국세 위축에 따른 정국 불안정 등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남조와 오랫동안 교류했던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힘쓴 것이다. 무령왕릉이 백제사의 타임캡슐임을 깨닫게 해 준다.

박완규 논설위원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