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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박정훈 칼럼] 안철수·심상정만 정상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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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뽑는 건지

구청장 선거인지 모를

포퓰리즘의 광풍에서

그래도 대선 후보다운

국가 과제를 말하는 것은

안·심 두 후보뿐이다

조선일보

작년 11월 '코라시아 2021 포럼'에 4당 대선 후보가 참석했다. 왼쪽부터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이재명 민주당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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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넘게 이어진 CJ대한통운 택배 파업엔 민노총 노조원 1600여 명이 참가 중이다. 대한통운 택배 기사 2만명 중 8%만 참여한 소수의 파업인 셈이다. 그런데도 배달이 지연되고 일부 지역에선 배송이 중단돼 택배 대란 우려까지 빚어지고 있다. 왜 그럴까. 한 택배 기사가 공개한 CCTV 영상에 해답이 담겨 있었다. 영상엔 노조원들이 비노조원을 따라 다니며 작업을 방해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찍혀 있다. 물건을 던지고 발로 차는가 하면 멱살 잡고 폭력까지 휘두른다. 8%가 92%의 목줄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급기야 일감이 끊긴 비노조원들이 “우리는 일하고 싶다”를 외치며 파업 반대 집회를 여는 일까지 벌어졌다.

기이한 것은 여야 대선 주자들의 이례적 침묵이다. 표가 되면 영혼이라도 팔 기세인 후보들이 배달 차질에 대한 여론 불만이 고조되는데도 비판 한 마디 한 일이 없다. 친노동 노선의 이재명 후보는 노조 편 드는 코멘트를 내놓은 것이 전부고, 윤석열 후보는 보수의 가치를 대변한다면서도 택배 파업엔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있다. 필시 선거 공학적 셈법 때문일 것이다. 민노총이라는 고도로 조직화된 집단을 잘못 건들면 손해라는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표가 안 되더라도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국가 미래를 위해 꼭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지금 우리 상황에선 노동 개혁, 연금 개혁 두 가지가 그런 일일 것이라 생각한다. 민노총으로 상징되는 귀족 노조가 기득권 적폐 세력이 된 지 오래다. 폭력을 휘두르고, 거리를 불법 점거하고, 공장을 멈춰 세우고, 집단 괴롭힘으로 사람을 죽음으로 모는 막무가내 집단을 그냥 놓아두고서 선진국이 될 수는 없다. 연금 문제는 시한폭탄처럼 째각째각 다가오는 예정된 미래다. 적게 내고 많이 받는 지금의 제도를 방치한다면 국민연금 적립금은 33년 뒤 완전 바닥나게 된다. 온 국민의 노후가 파산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국가 이슈가 또 있나.

노동·연금 개혁은 2030세대의 이해관계가 가장 크게 걸린 청년 문제이기도 하다. 정규직 노조의 기득권 때문에 청년들은 새로 고용 시장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취업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경직적인 노동 제도로 과보호 받는 기성세대가 청년들의 일자리 기회를 빼앗고 있다. 연금은 대놓고 세대 착취를 조장하는 구조로 짜여 있다. 예정대로 2055년 기금이 바닥나면 현재 32세인 1990년생부터는 연금을 한 푼도 못 받게 될 수도 있다. 일자리·연금의 ‘사다리 걷어차기’ 시스템을 고치지 않으면 청년들의 미래는 없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청년 이슈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입만 열면 2030을 위한다고 노래 부르는 후보들이 이 문제엔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참 기이한 노릇이다. 이 후보도, 윤 후보도, 지금껏 변변한 노동·연금 개혁안을 내놓은 적이 없다. 이 후보는 엊그제 6대 노동 공약을 발표했지만 주 4.5일제 같은 퍼주기 선심성 제안이 전부였다. 그는 ‘5대 경제 강국’을 만들겠다면서도 경제를 발목 잡는 세계 최악의 노동 환경을 어떻게 고칠지는 말하지 않는다. 윤 후보도 말로는 ‘귀족 노조 철폐’를 언급하면서도 구체적인 노동 개혁 공약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도리어 노동계 숙원인 공무원 타임오프제와 공기업 노동이사제에 찬성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연금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후보는 “연금 개혁을 해야 하지만 지금 단계에선 (하는 것이) 독선”이라며 구렁이 담 넘듯 도망 다니고 있다. 윤 후보 입장이 차라리 솔직하다. 토론회에서 질문이 나오자 그는 “연금 개혁을 공약으로 내면 선거에서 진다”고 실토했다. 연금을 ‘많이 내고 적게 받는’ 구조로 고치겠다고 하는 순간 연금 받는 고령자 표가 날라간다는 뜻이다.

두 후보의 비겁함과 대비돼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것이 안철수·심상정 후보다. 안 후보는 노동이사제·타임오프제 반대를 분명히 하며 연일 노동 개혁 메시지를 쏟아내고 있다. 국민연금과 공무원·군인연금 등을 통합 일원화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심 후보도 국민·기초·퇴직연금 세 가지를 종합적으로 수술하는 개혁안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인기 없어도 꼭 해야 할 국가 과제를 회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게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의 자세일 것이다.

안 그래도 이·윤 양강 후보의 퍼주기 경쟁이 갈 데까지 갔다는 말이 많다. 동네별로 쪼갠 동(洞) 단위 공약, 특정 아파트 단지를 위한 핀셋 공약을 쏟아내는 후보들이 가장 중대하고도 심각한 국가 과제는 피해가고 있다. 이게 대통령 선거인지, 구청장·동장 뽑는 선거인지 헷갈릴 지경인데 그나마 대선 후보다운 어젠다를 말하는 것은 안철수·심상정뿐이다. 포퓰리즘 광풍이 휩쓰는 미친 선거판에서 안·심 두 후보만 정상 같다.

[박정훈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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