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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부디 이땅에서 어머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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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 고 김경님 어머님께 올리는 이지현씨의 글

한겨레

2014년 요양병원에서 맞은 어머니(앞줄)의 생신잔치 때 ‘각설이’ 차림으로 공연을 한 이지현(오른쪽)씨와 동생 인현(왼쪽)씨. 광주에서 ‘5월 광대’ ‘애꾸눈 광대’로 활동중인 이지현씨는 2015년 공연하느라 모친의 임종을 못했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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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난국을 뚫고 2022년 새해가 솟았습니다. 벌써 아버님(이기동·1923~2002)과 헤어진 지 20년, 어머님(김경님)께서 하늘여행을 떠난 지 7년이 됐군요. 1928년생인 당신께서는 4살 때 외숙과 소꿉장난을 하다, 사고로 한쪽 가슴을 상실한 뒤, 외할머니마저 잃어버렸다지요? 외할아버지께서는 덕지덕지 묻은 가난을 털어버리고, 딸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불행을 막기 위해서, 어느 눈 내린 날에 15살 당신을 시집보냈습니다. 그런데 신혼을 만끽하기도 전, 아버님을 징용으로 뺏기고 말았으니, 그 설움과 분노를 어떻게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철천지 원수 일본이 항복하자, 2년만에 부상당한 몸으로 귀국하신 아버님을 맞은 당신. 하여 오랜만에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을 때, 또 6·25라는 동족상잔의 괴물이 덮칠 줄이야…. 낮에는 군인과 경찰, 밤에는 빨치산에 시달리며 구사일생의 나날이셨다죠? 그러던 중 임신이 되자, 태아라도 살려야겠다며 고모할머님이 계신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김구 선생이 은거한 곳)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이윽고 11년 시집살이의 한을 토해낸 득남의 순간. 그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습니까,

일제 ‘위안부’ 피하고자 15살때 시집

신혼초 징용간 남편 구사일생 귀국

한국전쟁 피난중 11년만에 첫 득남


‘80년 광주 5·18’ 두 아들 부상자로

‘망월동 묘지 이장 갈등’ 외동딸 자살

폐인된 자식들 살리려 노점상 나서


한겨레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전남 화순에 살던 시절 필자의 부모, 이기동(왼쪽)·김경님(오른쪽)씨의 모습. 선친은 일제 때 강제징용당해 오사카에서 노역을 하다 해방 뒤 돌아왔다. 이지현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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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그런데 소생은 어머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학창시절에는 ‘지앙’(말썽)을 부려 아버님을 종종 학교에 불러다니게 했지요. 청소년 시절부터 악극단을 기웃거리고 고교 야구 응원단장을 하며, 속만 썩였죠. 그러다가 생각하기도 지긋지긋한, 아니 ‘제2의 인생’의 계기가 된 ‘80년 5월’을 만나고야 말았습니다. 당신께서는 “광주가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절대 내려오지 마라” 말리셨죠. 그런데 어찌 불의를 보고서 가만있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남동생은 연행당했고 저는 부상을 당한 뒤 폭도로 몰렸습니다. 문중의 종손이란 기대가 실망으로 번지자, 당신은 넋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부천에 살고 있던 여동생(이인숙)이 내려오자, “너라도 시집보내야 내가 눈을 감겠다”라며 반강제로 결혼을 시키셨죠. 신랑은 망월동 5·18 민주열사묘역(묘지번호 114번)에 잠든 민병대 열사의 형이며, 제 친구였어요. 행복을 염원했던 동병상련의 결혼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은 광주학살 만행을 감추기 위해, 505보안대와 전남지역개발협의회를 통해 ‘5·18 묘지 이장 음모’를 획책했습니다. 광주는 두 번 죽임을 당했고, 동지인 유가족들은 분열됐으며, 집집마다 갈등과 싸움이 빈번했죠. 화가 난 여동생은 1983년 9월 음독자살하고야 말았습니다. 불쌍한 인숙이를 묻고 내려오던 날, 우리는 얼마나 통곡했는지…. 설상가상으로, ‘5월 가족’과 동지들과 반목과 갈등으로 홍역을 치르다,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린 저도 그만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살아나긴 했지만 어찌 그게 자식이 할 도리였겠습니까?

당신께서는 감시와 연행 그리고 사찰과 탄압에 이은 구속과 고문이 반복되는 자식의 불행 앞에 얼마나 애간장이 타셨을 것이며, 피눈물을 쏟을셨을까요? 그 애환을 달래고자 남광주시장 앞에서 노점상을 시작하셨고, 단속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자존심마저 팽개치고 악착같이 사셨습니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던 당신. 그렇게 갖은 수모와 고생 끝에 모아놓은 그 돈마저, 투쟁 자금과 연극을 준비하기 위해 모두 탕진해버린 ‘웬수’가 바로 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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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모친 김경님(오른쪽)씨는 1980년 5·18 때 부상을 입고 옥살이를 한 두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30년 넘게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남광주시장에서 노점상으로 일했다. 이지현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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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2015년 연극보다 더 연극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버님께서 징용당해 일하셨던 후지나 가타 조선소가 있던 오사카에서 연극이 호평을 받은 덕분에, 난생 처음으로 앵콜 공연을 하던 날이었습니다.

“여보, 빨리 병원으로 오시요.” “공연 시작해야 하는데, 왜?” “엄니가 금방 돌아가시게 생겼단 말이오.” “오메 어째야쓰까. 근디 어떻게 시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엄니한테 가겠는가? 미안흐네.” “세상에! 엄니가 중요하요 관객이 중허요? 마지막 가실 때까지 불효 할라요? 지비(당신)가 사람이오 짐승이요!?”

어머님. 설사 ‘호로자식’이라고 욕을 먹더라도 당신께 절대로 갈 수 없었습니다. 5월 영령들은 1980년 5월27일, 민주주의의 새벽을 밝히다 목숨을 바쳤는데, 어찌 관객들을 외면하겠습니까! 그래서 임종도 빈소도 못 지켰습니다. 연극을 마치고 관객들께 어머님의 소천 소식을 알렸습니다. 관객들이 우는 바람에 저 역시 참았던 슬픔에 울컥할 수밖에요. 이런 놈을 자식이라고 믿고 숨을 거둘 때까지 못난 저를 기다렸을 어머님, 이 불효자식이 무슨 말로 해명을 한들 용서가 되겠습니까?

가산을 탕진했을 때나 죽으려다 살아났을 때도, 단 한 마디 꾸지람이 없었던 당신. 그래서 더욱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당신은 이 못난 아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통일보다, 평범하게 가장 노릇을 하기 바랐지만, 저는 역사의 부름을 거역할 수 없어 투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하여 몸은 망가지고 가정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극기의 일환으로 냉수마찰을 하고 무등산을 맨발로 오르기도 했으며, 각설이로 분장하고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남을 즐겁게 하다 보니 기적처럼 우울증이 치유되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5·18을 문화예술로 승화시킨 ‘애꾸눈 광대’라는 연극인으로 진화했습니다. 또한 당신께서 열정적으로 활동하신 모습을 보며 쓴 글 ‘노점상’으로 신인문학상을 받고 시인까지 됐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다가 죽어가야 하는 줄 알았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절대 울거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만약 환생할 수 있다면 분단의 설움으로 목이 메인 한반도에서, 어머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십시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피눈물로 살다가 서럽게 떠나버린 우리 어머님. ‘광주학살 원흉’ 전·노 일당은 사죄 한마디 없이 떠났는데, 트라우마에 고통스러운 동지들은 계속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특히 진실이 암매장당한 채 42년을 맞았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머님, 그들은 떠났지만 우리는 역사의 등불을 켜고 진실을 밝힐 겁니다.

그리고 ‘주먹밥공동체정신’으로, 나누고 배려하며 봉사하겠습니다. 당신께서 원하는 세상을 만든 다음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그래서 못다한 효도를 올리겠습니다. 어머님.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그립습니다. 존경합니다.

광주/이지현 5·18부상자동지회 초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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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료를 드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4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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