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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보조인력 미지원’ 선관위 상대 차별구제 소송 “발달장애인도 ‘유권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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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발달장애인이 투표에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그림 투표용지를 도입하고 알기 쉬운 선거공보물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상대로 한 차별구제 소송을 준비 중인 발달장애인 임종운씨(왼쪽 사진)와 박경인씨(오른쪽). 가운데는 장애인인권단체 ‘피플퍼스트 서울센터’에서 만든 국회의원 선거 그림 투표용지 시안.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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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월9일 20대 대선을 앞두고 “투표 좀 하게 해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18세 이상의 국민 누구나 선거권이 있다’고 적힌 공직선거법이 “다른 나라 법 같다”고 말하는 이들은 수년째 거리에서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외쳐온 발달장애인들이다.

발달장애인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2020년 21대 총선부터 지침을 바꾼 탓에 기표를 도와줄 인력을 투표장에 동행할 수 없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차별이 맞다’고 판단했지만 선관위는 묵묵부답이다. 결국 발달장애인들은 “선관위가 참정권 보장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며 법원의 문을 두드렸다. 차별구제 소송을 준비 중인 발달장애인 박경인(28)·임종운(54)씨를 지난 25일 만났다.

■‘모두를 위한’ 기표 편의 개선

박경인씨

“문해자 중심 투표 도구 보완해
더 살기 좋은, 차별 없는 세상을”

6년 전 23년간의 시설 생활을 끝낸 박씨는 이동권 투쟁, 참정권 운동에 참여해왔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각당 후보들의 장애인 탈시설 정책을 눈여겨보고 있다. 하지만 막상 투표할 후보를 결정하고 기표장에 가도 글자로 빼곡한 투표용지를 보면 머릿속이 하얘질까봐 걱정이다. 박씨는 “투표용지가 너무 길고 숫자와 후보자 이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어 뽑으려고 한 후보자를 찾아내기 어렵다”며 “외국처럼 투표용지에 후보 사진이나 당 로고를 담고, 투표 칸도 넓히면 투표하기가 수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렇게 비장애인·문해능력자 중심의 투표를 보완하면 노인이나 한글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발달장애인들의 기표를 돕는 보조인력을 허용하는 게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박씨는 ‘공적 조력인’ 제도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부모님이나 사회복지사처럼 (장애인 당사자와) 관련된 사람만이 아니라 선관위에서 훈련된 사람들을 뽑아 공적 조력인으로 둬야 한다”는 것이다. 시설을 나온 뒤 집을 구하는 것부터 일자리를 유지하는 것까지 모든 일이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박씨는 발달장애인들이 원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꾼다.

박씨는 “정치를 잘해야 장애계도 사는 것 같다”며 “탈시설 예산을 확대하고, 장애인 돌봄·활동지원 서비스를 늘리는 공약을 펼치는 후보에게 투표하고 싶다”고 했다.

■탈시설 후 날아간 두 번의 투표 기회

임종운씨

“도와줄 활동가와 갔다 ‘제지’
휠체어 미는 것과 뭐가 다른가”

뇌병변·지적 중복장애인 임종운씨는 2018년 7회 지방선거 때 활동가와 함께 투표장을 찾았지만 투표소 관리원은 “혼자 투표하라”며 제지했다. 그가 “한글을 몰라 도움이 필요하다”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글자로 가득 찬 투표용지에서 후보를 식별하지 못해 결국 사표 처리됐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는 거소투표 용지가 집에 송달됐으나 기한을 넘겨 확인하는 바람에 투표하지 못했다. 임씨는 “(선관위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은 (보조인력 동행이) 되고 걸을 수 있는 장애인들은 도와줄 수 없다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발달장애인들이 기다리는 동안 앉을 의자도 마련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관위는 발달장애인들의 신체 거동을 투표관리관이 육안으로 관찰하고 투표 보조 여부를 판단하도록 지침을 개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를 두고 장애계는 문자 언어 사용이 어렵고, 손떨림 등 신체장애 동반 사례가 많은 발달장애인들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조치라고 지적한다.

발달장애인들은 이해하기 쉬운 형태의 선거공보물도 요구하고 있지만 선거공보물 제작은 각당 자율에 맡겨져 있다. 발달장애인들을 찾아가 공약을 설명하는 후보도 있지만 여전히 ‘이색 행보’쯤으로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장애인인권단체들은 공보물을 분석해 후보별 공약과 정당 색상 등을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다.

30년 넘게 시설 생활을 하다가 2016년 나온 임씨는 발달장애인들의 기표 편의 요구에 대한 주변의 회의적인 시선에 “투표를 안 하면 우리 장애인을 도와줄 사람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장애인 인권운동 현장에서 활동한 자신의 사진들을 보여주며 “우리도 뽑아야 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안지완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발달장애인은 분명한 생각이 있지만 정부는 이들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며 “장애 정도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장애 정도가 가장 심한 이들을 중심에 두고 (투표 제도를)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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