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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양권모 칼럼]이재명이 처한 ‘신뢰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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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엊그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맨바닥 큰절 사과를 했다. “부족함에 대해 사죄드린다”며 반성의 언어가 절절하다. 지지율 급변에 위기감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빼닮은 장면이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선대위 신년하례식(1일)에서 “저부터 바꾸겠다”며 큰절을 올렸다. 지지율이 급락, 대놓고 후보교체론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나온 큰절 사과다.

불과 20여일 새, 사과의 큰절 주인공이 윤석열에서 이재명으로 바뀌었다.

경향신문

양권모 편집인


그간 뭔 일이 있었을까. 우선 생활밀착형 작은 공약을 기치로 내건 ‘소확행’ 공약’과 ‘심쿵 약속’의 경쟁이 치열했다. 지금까지 이 후보는 52개의 소확행 공약을, 윤 후보는 20개의 심쿵 약속을 내놨다. 임플란트 건강보험 적용 확대·장년수당·면접 비용 지원, 부모 급여·소득공제 확대·가상자산 과세 유예 등이다. 이름만 가리고 보면 누구 공약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차별적이다. 공약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이나 가치는 찾을 길 없는 오로지 표만을 겨냥한 즉자적 공약인 탓이다. 지지율이 낮은 계층과 세대의 ‘이익’을 목표 삼은 매표성 공약에 우위를 따질 것도 못 된다. 재미(?)를 본 건 ‘탈모약 건보 적용’(이재명)과 ‘병사 급여 200만원’(윤석열) 정도뿐이다. 간신히 당 내홍을 수습한 윤 후보도 뒤늦게 공약 경쟁을 벌였으나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줄 공약과 ‘멸콩’ 챌린지만 선명하다. 위험천만한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김건희씨 ‘7시간 통화’ 녹취록이 공개됐고, 무속 의혹이 구체적 실체를 띠고 점화됐다. 충분히 치명적 리스크다.

정상적으로 득실점을 따진다면 이 후보가 타격을 받을 이유는 찾기 어렵다. 한데 박스권에 묶여 있는 이 후보의 지지율은 하락 조짐이고, 윤 후보는 반등하면서 재역전 흐름이다. ‘발광체 이재명’은 발광 효과를 내지 못한 반면, ‘반사체 윤석열’은 당 내홍 수습과 ‘여성가족부 폐지’로 상징되는 반여성주의 캠페인으로 소위 ‘이대남’의 지지를 회복한 결과다. 위험천만한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김건희씨 7시간 통화 녹취록과 심각한 무속 연루 의혹은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민주당으로서는 “최순실보다 더 할 수 있는 김건희씨 녹취록이 윤석열에 플러스가 되는 황당”(노웅래 의원)한 상황에 직면했다. 기득권 내로남불의 덫에 걸린, 신뢰의 위기에 빠진 민주당과 이 후보가 대척에 있기 때문이다. 반문재인 깃발 외에 경륜, 자질, 비전, 정책 역량 등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윤 후보와의 경쟁에서 이 후보가 허덕이는 것은 두꺼운 정권교체 여론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뢰의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취약 세대와 계층을 겨냥한 매표 성격이 태반인 ‘소확행 공약’부터 표가 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이 후보의 이미지를 두껍게 했다. ‘탈모치료 건보 적용’이 이 후보의 대표상품이 되는 건 무안한 일이다. 기본소득, 국토보유세, 전 국민 재난지원금 등 ‘이재명 브랜드’ 정책을 놓고 오락가락한 것도 마찬가지다. 원칙 없는 실용주의는 기회주의로 비치기 십상이다. 이 후보의 부동산 문제 대응이 대표적이다. 이 후보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실패를 반성하면서 대안으로 내놓은 게 폭탄공급과 규제 완화, 감세 등이다. 주택공급과 감세, 규제 완화는 기본적으로 보수의 영역이다. 여기서 경쟁은 아무리 정책 역량이 빈약한 윤 후보라도 이길 수가 없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죄다 뒤집는 공약을 쏟아냈지만, 서울의 여론 지형은 요지부동이다. 이 후보의 급변한 부동산 정책이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방증이다.

두꺼운 정권교체 여론을 상대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와 ‘소확행 공약’으로 넘을 수는 없다. 반성과 성찰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원칙 있는 실용주의로 ‘민주당후보다움’을 되살려내야 한다. 송영길 대표의 불출마 선언 등 민주당의 인적 쇄신은 그 기폭제가 될 수 있다. 불평등, 일자리, 노동, 주거 복지, 저출산과 노후, 공정, 청년들의 불안한 미래 등 문재인 정부의 실패 지점에서 반성과 혁신을 보여주고 이재명의 개혁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남북 문제와 외교 정도를 빼고는 문재인 정부와 ‘다르게’ 하겠다는 것, 이 후보의 비전도 거기 어간에 머물러 있다. 문재인 정부와 ‘다르게’를 놓고 경쟁하면 윤 후보를 당할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의 미래가 윤석열 대통령의 미래와 어떻게 다르고, 얼마나 더 나은지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 후보의 이번 큰절 사과와 눈물 호소는 쓰디쓴 추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양권모 편집인 sul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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