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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사람 범죄자로, 얼굴까지 노출... 반성은 없다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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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바로잡습니다] 울릉도 사건

언론 불신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권력으로의 편향된 시각과 부당한 공권력으로부터 진실의 편에 서지 않은 언론의 과거가 큰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국가폭력피해자들의 과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진실을 추구하고 공정한 보도를 위해 노력했는지 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지난 2014년 12월, 소위 '울릉도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했던 이성희 교수가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울릉도간첩단' 40년 만에 무죄를 확정 받다
11일 이OO 전 교수 대법원 무죄 판결...박정희 정부의 대표적 조작사건
= 11일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이OO 전 전북대학교 교수의 재심에서 검사의 상고를 기각했다. 울릉도간첩단 사건 재심 첫 무죄 확정판결이다. (중략)
울릉도 간첩단사건의 피해자는 이 전 교수를 포함해 울릉도 주민과 일본에서 공부했던 전라북도 주민 47명이다. 그 중 3명은 사형에까지 처해졌다. (중략)
이 전 교수는 이들 가운데 처음으로 진실화해위 문을 두드렸다. 그는 2006년 진실규명을 신청, 2010년 6월 "중앙정보부의 가혹행위는 재심사유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받아냈다. 간첩조작까지 밝혀내지 못한 '절반의 진실규명'이었지만, 그는 곧 법정싸움을 시작했다. 2012년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재판장 김동오 부장판사)는 그의 간첩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 오마이뉴스 2014. 12. 12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울릉도간첩단' 사건의 수괴로 지목되어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던 이 교수는 사건 발생 40여년 만에 진실을 밝혀냈다. 그는 사건 당시 전북대학교 총장에 내정될 만큼 학자로서 인정받고 있었지만, 이 사건 이후로 모든 것을 잃었다.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이 교수뿐만이 아니다. 30여명 이상이 구속된 대규모사건이었다. 당시 동백림 사건이나 통혁당 사건에 견줘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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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3월 15일 경향신문 1면에 기재된 울릉도간첩단 사건. 46명의 사진이 기재되었는바, 단지 피의자로 조사받은 이들까지도 모두 언론에 사진이 노출되었다. 이중 32만이 기소되었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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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거점 간첩단의 검거
중앙정보부가 지난 2월 하순에 일망타진, 15일에 그 전모를 발표한 울릉도를 거점으로 한 북괴간첩단 사건은 그 인원과 지역의 광범위함에 있어서 간첩 검거 사상 최대 규모의 것일뿐 아니라 그 성격에 있어서 북괴가 대한민국에 대하여 지금 무엇을 꾀하려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노정한 것으로서 우리의 비상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한 것이다.
- 경향신문 1974. 3. 16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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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 3. 16. 경향신문 4면 기사. '폭력통일 획책'이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기사는 마치 울릉도간첩단사건 관련으로 인해 사회가 극도의 혼란과 폭력상황으로 내몰릴 듯한 공포감을 심어주고 있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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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난 북괴의 대남전략정체
울릉도거점 간첩단사건 특징,배경
폭력통일 획책 굳혀
'혁명' 위해 온갖 수단 동원
15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은 그 규모나 침투조직면에 있어 동백림간첩단사건(67년), 통혁당간첩단사건(68년) 등과 견줄만한 큰 간첩단 사건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울릉도 간첩단사건은 그 사건 자체가 갖는 성격적 특징뿐 아니라 북괴의 최근 대남통일전략의 정체를 우리가 새삼 파악할 수 있었다는데 또한 의의가 있는 것 같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도 이날 기자들의 질문에 북괴 측의 대남통일전략이 대화에서 폭력혁명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이번 사건의 특징도 바로 북괴의 대남통일혁명 전선구축을 위한 모델적 간첩망이라고 지적했다.(후략)
- 경향신문 1974. 3. 16. 4면

여타 다른 간첩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 역시 범죄 사실이 확정되기도 전에 피의자들의 범죄 혐의가 언론에 그대로 노출되었고, 얼굴사진도 그대로 노출되었다.
울릉도거점 간첩단 암약상 전모
월북·노동당 입당 후 잠입
영관 등 20명의 '65동지회' 조직 군부 침투 기도
남파간첩 숨길 비밀지하실 확보
두 차례 월북 잠입
...
- 경향신문 1974. 3. 15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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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 3. 16. 경향신문 2면 사설기사.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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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학계,군에 침투 암약-중앙정보부 발표 대규모 간첩단
울릉도를 거점 지하망 조직
혼란 틈타 현 정부 전복기도
전영관 일 거쳐 수차 월북 간첩교육 받아
공작금 6천만원 무전기 6대 압수
중앙정보부는 '울릉도를 거점으로 한 간첩일당' 중 지난 63년 4월부터 71년 10월까지 10차례에 걸쳐 일본을 왕래하면서 재일간첩 이좌영에게 포섭된 전북대 교수 이성희, 공화당 부안지구부위원장 최규식, 동 진안지구 조작부장 유창렬, 신민당 진안지구 조직부장 이한식 및 고창농촌지도원 김영권 등 간첩들은 65년 10월부터 지난 2월까지 유학 등의 명목으로 일본에 가서 수차례에 북괴를 왕래, 간첩교육을 받고 국내에 잠입, 정계, 하계, 경제계, 농어촌 지도층에 침투하여 전북일대를 중심으로 '위친계', '농사개량구락부' 등의 서클을 조직, 정계, 언론계 요인에 접근, 유사시 학생동원을 꾀하는 한편 군부내 조직망 부식을 위해 현역 모 장군포섭을 시도하는 등 간첩활동을 자행했다고 발표했다.
- 매일경제 1974. 3. 15 7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하 중정부장)이었던 신직수 부장의 언론기자회견 형식의 발표에 언론은 별다른 사실 확인 없이 배포된 보도자료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심지어 신 부장이 범죄사실이라고 발표했던 내용은 공소과정에서 슬그머니 빠졌다. 대표적인 내용 중 하나가 당시 군 장성이었던 이 교수의 동생을 통해 군부침투를 하려 했다는 언론의 발표였다. '현역 모 장군 포섭시도'라는 언론의 발표로 간첩세력이 군부까지 침투한 심각한 사안으로 기사화 되었다. 그러나 정작 공소장과 판결문에는 이 내용이 빠져있다. 현역 군 장성이 연루되었다는 내용은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기에 충분하다. 시끌벅적 했던 범죄사실이 정작 기소단계에서는 슬그머니 빠지게 되었으나, 언론에서는 이 내용에 대한 사실 여부를 따져보지 않았다.

당시 신문에서는 위 울릉도간첩단 사건을 대서특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 전반의 반공태세 강화와 공공시설에 대한 안보태세 경비 강화에 대한 주문을 강조했다.

아래 기사는 우리 사회 주요시설에 대한 북한의 공작이 활발해 질 것이라며, '침투', '경비', '격화'라는 단어를 쓰는 등 마치 위기상황이 코앞에 닥친 듯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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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 3. 27 조선일보 1면. 공공시설에 대한 북한의 타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 ⓒ 조선일보



<공공시설 경비 강화>
공단, 항만 등 간첩침투 대비
김총리 지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26일 국무회의에서 북한 공산집단의 최근동향에 대해 정부와 국민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동태를 주시하면서 우리의 방위태세와 주요 공공시설의 자체경비를 더욱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김 총리는 북한공산집단이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자고 제의하고 울릉도거점 간첩단을 통혁당 조직이라고 공공연히 시인하는 등 일련의 행동은 남북대화에 성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남공작과 침투활동을 더 한층 격화하겠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정부 각 기관은 중요 공업단지, 공장, 교량, 터널, 방송시설, 항만, 선박, 항공기 등 각종 시설에 대한 경비태세를 최단 시일 내 점검해서 자체경비를 강화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 조선일보 1974. 3. 27 1면

정작 이러한 사회적 불안감으로 인해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 뿐만 아니라 가족, 친척 등은 '적'에 동조한 '이적행위자'로 살아야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부모님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자녀 중 한 명은 당시의 어려운 생활을 이렇게 회상했다.
"학교생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에요. 반공사상이 투철했던 당시 신문에 '울릉도거점 간첩단 47명 검거'라며 아빠 이름이 맨 위에 올랐어요. 그때까지도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언론 발표 이후 주위에서 저를 대하는 태도는 확실히 달라졌죠. 나를 친구로 대하지 않는 무리도 있었고, 발표도 숙제검사도 안하고 투명인간 취급하는 선생님도 있었죠."
- 1974년 울릉도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자녀 전00 '지금여기에' 증언

울릉도간첩단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당시 주요 신문들은 40년 뒤 무죄 선고에 대한 사실에 대해서는 과거 간첩단 사건 발표에 비해 턱없이 적은 기사를 내보냈다. 단 몇줄의 단신 형태의 결과보고로 끝나고 있다.

오마이뉴스

▲ 2015년 1월 26일 동아일보 기사. 울릉도사건 재심판결에 대한 기사이다. 40년전 사건 당시 기사에 비해 턱없이 설명이 부족한 기사이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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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간첩단 사건
울릉도간첩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OO 씨 등 5명이 41년 만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2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1974년 '울릉도 간첩단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된 전영관씨(1977년 사형)의 부인 김용희씨에 대한 재심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6일 밝혔다. 또 간첩 신고를 하지 않은 혐의 등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전 씨의 친인척 등 4명에 대해서도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김씨는 간첩 혐의로 사형이 확정.집행된 전영관씨의 부인으로, 1974년 남편의 간첩행위를 방조한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전씨의 친인척 3명은 전씨의 간첩 혐의에 대해 수사기관에 알리지 않았다는 혐의로 각 징역 1년을, 이모씨(사망)는 북한의 대남 선전, 비방용 라디오 방송을 청취해 반국가단체 활동에 동조한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 동아일보 2015. 1. 26

피해자들의 마음, 상태, 환경에 대한 인터뷰나 이 재심무죄판결이 의미하는 사회적 의미,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조치 등에 대한 어떠한 기사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변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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