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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7.7만개 중 7만개가 '사정권'...중소건설사 도산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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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법 시행 D-2]도산 공포 휩싸인 중소 건설사

연립주택 한동도 50억 넘어...영세업체 아니면 당장 법 적용

등록 건설사 7.7만개 중 7만개 이상이 중대재해 처벌 사정권

"현장 문제점 면밀히 파악, 안전한 작업환경 조성하는 게 우선"

서울경제


충청 지역의 중견 건설 업체 B사는 지난 1990년대에 설립된 이래 창업주가 대표를 맡아 30년가량 기업을 끌어왔다. 이 창업주는 그동안 인지도 있는 주택 브랜드를 만들어 안착시키는 등 성과를 거뒀지만 지난해 하반기 대표이사에서 사임했다. 대표이사에 중임된 지 불과 5개월 만이다. 건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수십 년 시장에서 활약한 베테랑 건설인도 중대재해법이라는 리스크는 예측 불가능할 정도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중대재해법은 사망 사고 등이 발생했을 때 법에서 규정한 관리 의무 등을 미리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면 대표이사에게 적게는 1년, 많게는 7년의 징역형을 부과한다. 하지만 시행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에도 어느 수준으로 관리를 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하다. 중견 건설사 오너들이 대표이사직을 내놓는 것도 이 때문이다. B사뿐만이 아니라 김상수 한림건설 회장(대한건설협회 회장), 최은상 요진건설산업 부회장, 태기전 한신공영 부회장, 권민석 IS동서 사장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고 전문 경영인 체제로 전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예산과 시스템을 갖춘 대형 건설사들은 안전 관련 조직을 강화하고 최고안전책임자(CSO)를 신규 선임하는 등 총력 대응에 나섰지만 중소기업들은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 오너가 대표이사에서 사퇴하는 방안조차도 중견기업 이상에서나 가능하다는 반응이다. 주택산업협회 관계자는 “오너가 직접 대표이사를 맡고 직원 몇 명과 함께 꾸려가는 중소 건설사 입장에서는 오너가 2선으로 물러날 여력조차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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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 건설사들 사이에서는 아예 자포자기하는 분위기까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한건설협회 관계자는 “중소 건설 업체 대표들도 나름대로 컨설팅을 받는 등 노력하지만 무엇을 어느 수준까지 해야 하는지 몰라 결국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법 시행을 맞게 됐다”며 “현 상황에서는 사고가 터지면 속수무책이라 중소 건설사가 중대재해법의 최다 적용 대상이 될 소지가 크다”고 우려했다.

업체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부분은 중대재해법이 지정한 의무 가운데 △안전 관리 체계 구축 △안전보건 관계 법령에 따른 관리상 조치 의무 등 두 가지다. 비용·현실성 문제와 함께 조문의 불명확성이 걸림돌이다. 최수영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업주 입장에서는 조문대로 ‘관계 법령에 따른 의무’를 지켜야 하는데 건설만 해도 수많은 법령이 적용되는 만큼 적어도 어떤 법들인지는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무 조치가 정확히 무엇인지, 어느 정도 준비해야 추후 대표이사가 처벌을 면할 수 있을지를 현 단계에서는 알 수가 없어 중소 업체들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같이 중대재해 발생 시 처벌로 이어질 수 있는 기업이 7만 개 이상일 것으로 보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7월 기준 국내에 등록된 건설 업체 수는 총 7만 7,822개다.

상시 근로자 수 50명 미만이거나 사업장 규모가 50억 원 미만일 경우 오는 2024년 1월까지 법 적용이 유예되지만 이마저 실효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건설 업종의 경우 사업장 규모만 적용되는데 20가구짜리 연립주택 한 개 동만 지어도 50억 원이 넘기 때문이다. 건설 업계 관계자는 “웬만한 영세 업체가 아니라면 대부분 당장 적용을 받는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더욱이 중대재해법에서 보는 공사 규모 50억 원에는 실제 공사 계약 금액에 더해 발주자가 자재를 구매해 시공 업체에 제공해주는 관급 자재 비용까지 포함된다. 공사 계약은 35억 원이라도 관급 자재비가 15억 원이라면 50억 원을 넘기 때문에 해당 사업장은 중대재해법 대상이 되는 구조다.

최 연구위원은 “처벌 수위가 높다 보니 결과적으로 사고는 일정 수준 감소할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통한 사고 예방에는 한계가 있다”며 “사회가 원하는 획기적인 수준으로 건설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처벌보다 현장의 문제점을 면밀히 파악하고 안전한 작업 환경을 조성하는 게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대한건설협회를 비롯한 건설 유관 단체는 2020년부터 중대재해법 개정을 요청해오고 있다. 건설협회 관계자는 “중대재해법은 영국의 기업과실치사법을 참조해 만든 법이지만 영국 법에도 없는 대표이사 처벌 조항이 추가됐다”며 “법인에 대한 처벌을 엄하게 하더라도 대표이사에 대한 징벌적인 처벌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흥록 기자 rok@sedaily.com노해철 기자 su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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