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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한겨레 프리즘] 위령비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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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사고 희생자 위령비는 걸어서 가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지도앱은 도로 두개를 가로질러 가라고 안내하지만, 철조망에 가로막혀 도로로 내려갈 수 없다. 철조망 건너 위령비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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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춘화 | 사회정책팀장

‘성수대교 사고희생자 위령비(주차장)’. 차를 타고 성수대교 북단 강변북로 진입로를 지날 때면 파란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자동차 전용도로 한가운데 위령비라니… 생각도 잠시, 차는 빠르게 강변북로로 들어선다. 언제 그런 생각이나 했냐는 듯 위령비도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그곳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1일 공사 중이던 광주 아파트가 무너져내리고 실종자 발견 소식이 들리지 않는 지경이 되어서야 위령비가 떠올랐다. 지도 앱을 켰다. 앱은 서울숲을 지나 위령비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지도는 50m 앞 위령비를 가리키는데, 길은 철조망에 가로막혔다. 철조망을 따라 한참을 걸었지만 출입구는 없었다. 철조망 틈으로 두 갈래의 도로가 보였다. 차들이 빠른 속도로 도로를 내달렸다. 출입구가 있었던들 쉽게 건널 수 없는 길이다. 멀리 위령비 주차장이 보이고, 그 앞엔 ‘강변북로 구간 보행자 통행금지’라는 도로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여기 위령비가 있으나 건너오지 말라.

1994년 성수대교 붕괴로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버스를 타고 등교하던 무학여고 학생 8명도 친구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부실 공사가 원인이었다. 참상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족들은 사고 현장이 잘 보이는 곳에 위령비가 들어서길 원했다. 3년 만에 위령비가 자리잡은 곳은 강변북로 옆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걸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2005년 강변북로 진·출입 램프가 설치됐고 위령비로 가는 길은 거의 끊어졌다. 도시개발은 고속 성장의 시대, 인재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추모하는 공간마저 동강 냈다.

이듬해 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은 어떨까. 500여명이 숨진 그 자리엔 37층짜리 주상복합아파트가 세워졌다. 유족들은 그곳에 작은 비석을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화점 무너진 땅 팔아 유족들 보상금 줘야 하는데 그런 ‘혐오시설’이 들어오면 그 땅을 누가 사겠냐.’ 집값 앞에 유가족의 아픔은 혐오시설이 됐다. 결국 위령탑은 엉뚱하게도 참사 현장에서 5㎞ 남짓 떨어진 양재 시민의숲 가장 구석진 곳에 세워졌다.

대한민국은 늘 참사의 기억을 후미진 곳으로 몰아낸다. 참사가 발생하면 다시는 같은 사고를 반복하지 않을 것처럼 세상이 들썩대지만, 결국 비석 하나 세우고 해마다 추모제 한번 열면 그뿐이다. 그마저도 몇해 지나면 유가족만의 일이다.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그저 곁에 두고 기억하자는 요구는 너무도 소박해, 독일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나 미국 9·11 테러 희생자 추모 공간인 ‘9·11 메모리얼 기념관’을 언급하기조차 면구스럽다.

잘못을 지우고 가리기에만 급급하니 참사는 잊을 만하면 되풀이된다. 무리한 설계 변경과 부실한 기초 보강 작업, 불량 골재 사용… 원인도 복사기로 찍어낸 듯 똑같다. 무너진 광주 화정아이파크 현장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다. 행정당국의 승인 없이 수직 하중을 버텨내야 할 기둥의 수를 줄인 정황이 포착됐다. 불량 레미콘이 사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동절기 콘크리트 양생 기간도 지키지 않았다는 현장 증언도 나온다. 이 모든 부실 공사의 근본 원인에는 불법 다단계 하도급이 있다. 100억짜리 공사가 다단계 하도급으로 60억짜리로 토막 나니, 하청업체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 재료를 아끼고 공사 기간을 단축시킬 수밖에 없다.

“비명에 가신 이들 애닯다./ 부실했던 양심 탓이로다. (중략) 여기 통한의 다리 곁-이 증언의 강 언덕에/ 오늘 부끄러이 조촐한 돌 하나 세워 비오니/ 님들의 크신 희생 오랜 날 깨우침 되오리니” 가지 못한 성수대교 희생자 위령비에는 당시 무학여고 국어 교사였던 변세화 시인이 쓴 추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애달픔이 가족을 잃어버린 몇몇 이들에게 한정된다면 참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위령비로 가는 길을 다시 이어야 하는 이유다.

sflow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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