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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이상헌의 바깥길] 죽음이 다른 죽음으로 잊히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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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 조금은 좋아지겠지만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일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38%는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했다. 이런 소규모 사업장에는 이 ‘시끌벅적한’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또 42%는 5~49인 규모 사업장에서 일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적용이 유예된 사업장들이다.

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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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문득 삶이 무료해지거나 세상이 너무 뻔하다는 생각이 들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누리집에 서둘러 가보길 바란다. 눈이 번쩍 뜨이고 자세를 고쳐 앉게 될 것이다.

“근로자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단은 누리집 가운데에 큼직한 건물 전경을 펼쳐두고, 그 위에 빨간색으로 선명한 뉴스 속보를 배치했다. 마치 변화무쌍한 실시간 주식정보처럼, 일주일 남짓한 기간 동안 벌어진 ‘사망사고 속보’가 띠처럼 길게 이어진다. 날짜와 장소, 그리고 죽음의 장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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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누리집 화면. 왼쪽 상단에 ‘사고사망 속보’ 표시가 보인다. 공단 누리집 갈무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19 청주, 3층 창문 발코니에서 떨어짐, 1/17 인천, 비계에서 떨어짐, 1/19 군산, 철거물에 깔림, 1/18 서울, 엘리베이터 개구부 내 지지대 설치작업 중 떨어짐, 1/17 울산, 수문개폐장치 수리 잠수작업 중 익사, 1/15 남양주, 화물용 승강기에 끼임, 1/15 대구, 크레인 거더에 깔림, 1/15 인천, 고정되지 않은 개구부 덮개를 밟고 떨어짐, 1/14 횡성, 벌목작업 중 나무에 맞음, 1/14 화성 콘크리트 양생작업 중 일산화탄소 중독, 1/12 천안, 화물차량에 깔림, 1/12 인천 PRD 케이싱이 넘어지면서 작업자와 충돌.”

이 길고 긴 속보의 벨트에는 우리가 얼마 전 분개했던 사건들은 이미 없다. 기억하시는가. 한달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젊은 남자가 고압선에 타 죽었다. 한전의 하청업체 노동자였다. 안전을 보장하는 활선차가 하청업체에 있었지만, 그는 조그마한 트럭을 몰고 갔다. 활선차가 없었으니, 전봇대를 타고 올라갔다. 둘이서 같이 해야 할 일을 혼자 했고, 그것도 면장갑을 끼고 일했다. 21세기 장비와 작업 매뉴얼이 있었는데 굳이 맨손 작업을 한 이유에 대해 회사는 짧고 명쾌하게 답했다. “13만5천원짜리의 단순공사”였기 때문. 공사나 일거리가 싸구려이면 일하는 사람의 안전도 싸구려 취급을 받는다는 것. 하기야 산업혁명 시절에 증기선이 나와 신세계를 구가했던 영국에서는 수백명의 여성이 강 위의 배를 끌었다. 기계보다 그녀의 일당이 쌌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잠시 놀라고 약간 분개하고 조금 더 짜증내다가 잊으면 그만이다.

그러니 작년 봄 평택항 젊은 노동자의 사망사고는 말해서 뭐 할까. 아득한 선사시대로 사라진 지 오래다. 아마 그때는 공단 누리집에 “4/22 평택, 컨테이너 청소작업을 하다 깔려 죽음”이라는 속보가 떴을 것이다. 또 그 뒤로 다른 죽음의 속보가 따라왔을 것이다. 그렇게 속보 코너에서 사라지고 잊혔을 것이다.

작년에 일하다가 죽은 사람이 828명이다. 하루에 2.3명이고 일주일에 15.9명이다. 한달치 속보를 다 모아 두려면, 주식시장 시세 현황판 정도의 대형 전광판이 필요할 지경이다. 사망자 수도 별반 차이가 없다. 2019년에 855명, 2020년에 882명이다. 일터의 죽음에 경악하고 전후 사정을 따지며 경건하게 슬퍼할 시간도 없다. 또다른 죽음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죽음의 컨베이어 벨트이고 ‘모던 타임즈’다.

고압선 위의 죽음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광주에서 아파트가 무너졌다. 지난주에 생긴 일이다. 아직도 다섯명의 노동자가 실종 상태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무너지면, 우리는 실종된 시민들을 찾느라 밤새 불을 밝힌다. 방송차량도 총동원되어 밤낮으로 소식을 알린다. 하지만 노동자의 실종에는 관심도 실종이다. 대신 입주가 늦어지는 것을 걱정하고 아파트 가격을 걱정한다. 건설사도 그런 비난이 더 두렵다. 저 어딘가에 묻혀 있을 노동자를 당장 찾아내라고 하는 소리는 콘크리트 더미에 같이 묻혔다. 실종 노동자들의 가족만 발을 동동 구른다. 노동자가 잠깐 불려나올 때도 있다. 부실의 원인을 떠넘기고 싶을 때는 외국인 노동자를 불러들인다. 저런 놈들을 데려와 일을 시켜 이 사달이 났단다. 노동자는 죽으면 잊히고, 살아 있으면 편리한 손가락질의 대상이다.

언론에 한 줄이라도 나오면 그나마 ‘다행’이다. 언론은 젊은 죽음에 잠시 떠들썩하다. ‘꽃다운 젊음’ ‘결혼을 앞둔’ ‘어린아이를 두고’ 같은 수식어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일터의 죽음은 국민 ‘드라마’가 된다. 죽음의 구조적 이유와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은 부차적이다. 드라마적인 소재가 사라지면 관심도 사라진다.

소리 소문 없이 죽어가는 노동자들은 훨씬 더 많다. 일터에서 죽은 사람들의 40% 이상은 60살 이상이다. 50대도 30% 가까이 된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이다. 저 속보판에만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딱딱한 행정기록에만 남은 사람들. 그들 죽음의 존재를 알지 못하니, 우리는 죽음의 이유를 따지지도 않는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 조금은 좋아지겠지만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일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38%는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했다. 이런 소규모 사업장에는 이 ‘시끌벅적한’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또 42%는 5~49인 규모 사업장에서 일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적용이 유예된 사업장들이다. 따라서 이 ‘요란했던’ 법은 산업재해 사망의 80%에 침방울 하나만큼의 영향도 미칠 수 없다. 지금 추세라면, 올해도 700명 정도는 이런 작은 일터에서 죽을 것이고 중대재해처벌법은 너무나 ‘중대’해서 이런 ‘작은’ 죽음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다.

이틀 만에 다시 사망사고 속보를 확인한다. 새로운 소식이 보태지고, 일주일 지난 속보는 벌써 사라졌다. “1/19 양주, 회전 중인 스크루에 끼임, 1/20 포항, 작업 중 끼임, 1/18 해남, 작업 중 정화조에 떨어짐, 1/19 영암, 선박 내 이동 중 떨어짐.”

“1/20 포항, 작업 중 끼임”이라고 건조하게 적힌 사고 현장은 ‘다시 한번’ 포스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용역업체 노동자다. 지난 4년 동안 포스코에서는 24명이 죽었다. 특히 지난해 사망사고에 대해서 고용노동부는 “철저히 조사하고 엄중 조치”하겠다고 했고, 회사도 “무거운 책임감”으로 “재발방지와 보상”을 약속했다. 일년 만에 도돌이표처럼 돌아왔다. 그나마 회사는 운이 좋다. 오는 27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생긴 사고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엄중조치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면 되겠다. 곧이어 다른 죽음이 따라오고, 긴 망각의 시간이 축복처럼 찾아올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짜증스럽다면, 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누리집의 속보 코너에는 ‘접기’ 기능이 있다. 누르면 사망사고 소식은 기적적으로 사라지고, 세상은 평화로이 선거 구호로 떠들썩할 것이다. 그저 한 죽음이 다른 죽음으로 잊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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