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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신영전 칼럼] 봉황은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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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시대가 말이여, 너무 오래 태풍이 읍써어

정권 왔다니 갔다니 깔짝대는 거 말고 말여

썩은 것들 한번 깨끗이 갈아엎는 태풍이 읍써어

어이 친구, 자네 죽었능가 살았능가


한겨레

(싸우지 않는) 양들만 있는 나라는 늑대들로 이루어진 정부를 갖게 될 것이다. 매카시즘 광풍에 맞서 싸웠던 미국 기자 에드워드 머로의 말이다. 지난 13일 2022대선청년네트워크 활동가가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대선 후보들에게 청년 정책에 관한 비전 제시를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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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며칠 전 순천만 습지에 갔다. 단골 꼬막집에도 들렀다. 삶은 꼬막은 여전히 맛있었지만 씨알이 작아서인지 맛이 예전 같지 않았다. 쩝쩝 입맛을 다시며 도착한 순천역 앞에서 ‘순천’ 지명의 유래가 적힌 석비와 마주쳤다. 요약하면, ‘순천’(順天)은 후백제 때 이 고을의 두 귀족이 ‘하늘의 순리에 따라’ 고려에 귀화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때가 때인지라, 하늘과 별의 뜻에 따라 대통령으로 출마한다는 정치가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가고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헛헛하게 웃었다.

서울행 기차 안 티브이(TV)에서 대선 뉴스들이 연이어 흘러나오자 괜스레 심사가 뒤틀려 눈을 질끈 감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더니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다 안 오시뇨/ 하늘아 무너져라/ 잔별아 쏟아져라.” 노래 속 봉황은 벽오동에만 보금자리를 트는데, 사람들은 봉황이 나타나면 태평성대가 온다고 믿었다. 조선시대 대사헌을 지낸 정구는 함안에 흙을 모아 봉란(봉황의 알)을 만들고 벽오동 천 그루를 심어 봉황이 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정구는 틀렸다. 대선 철을 맞아 교회나 사찰에서 좋은 대통령 오게 해달라는 기도도 마찬가지다. 그 마음은 갸륵하나 딱 그만큼이다. 성인의 말처럼, “연못에 던져진 돌이 기도한다고 떠오르겠는가?”

대선 공간은 신이 올 수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의 몫으로 남겨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공간에서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고 움직여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해야 한다. 벽오동이나 심고 있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싱싱하고 멋진 미래 구상을 둘러싼 치열한 정책 경쟁의 축제는 사라지고 네거티브와 혐오, 거짓, 무지, 주술, 위선의 쓰레기로 가득 찬 쓰나미가 몰려오는 듯한 정치판에서 가급적 멀리 떠나고 싶으니 어쩌랴. 하지만 이것 역시 위선이다. 그 지저분한 쓰나미는 나와 내 친구, 내 부모의 또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 미국 매카시즘의 광풍과 싸웠던 기자 에드워드 머로의 말처럼 (싸우지 않는) 양들만 있는 나라는 조만간 늑대들로 이루어진 정부를 갖게 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거대 정치·종교·언론 권력과 대자본의 뒷배를 이겨낼 수 있을까? 자기 존재를 에스엔에스(SNS)의 ‘좋아요’ 클릭수라 믿어 자극적인 언행을 쏟아내고, 행복을 주가 상승률로 대치하여 돈만 된다면 불법을 저질러도 모른 척하고픈 우리 안의 욕망을 넘어설 수 있을까?

강가 갈대숲을 지나 불던 겨울바람에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노곤함이 밀려와서일까? 어지러운 상념 중, 갑자기 달리는 기차 소리가 말발굽 소리로 바뀌더니 한 여인이 걸어 나온다. 100여년 전 어느 날, 거친 숨을 내쉬며 달리는 경주 말들 속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 나온 여인, 에밀리 데이비슨, 그녀는 시속 70킬로미터로 폭주하는 왕의 말 안머의 고삐를 움켜쥐려다 그 말에 부딪혀 두개골이 파열되고 며칠 후 사망했다. 하지만 남성만 투표하던 이 땅의 야만을 그녀의 걸음 수만큼 몸으로 밀어냈다. 그녀가 없었다면 인류는 얼마나 초라했을까?

한 인권운동가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폭력의 원리가 관철되고 있으며 글이나 기도, 염원만으로 변할 만큼 신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이성이 폭력적 구조의 벽에 부딪히는 지점부터는 어쩔 수 없이 ‘입’이 아닌, ‘기도와 염원’이 아닌, 달리는 말 앞에 서는 ‘근육’이 현실의 어둠을 뚫고 가야 한다. 신이 허락한 ‘우리의 공간’을 온갖 쓰레기로 뒤덮는 이들, 성별·세대·지역 갈등을 부추기고, 무엇보다 약자들을 공격함으로써 다수의 아군을 만들어내는 졸렬한 정치세력들과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정치가의 팬덤·댓글부대·모사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유·평등·형제애의 가치로 작동하는 공동체를 지키는 바리케이드 앞 무장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 선거의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다. 하여 다시 한번 명토 박자. 봉황은 오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봉황이 되지 않는 한.

그러고 보니 모처럼 찾은 순천만 꼬막 맛이 예전 같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해마다 시인 친구에게 꼬막을 보낸 이의 말이다. “큰 태풍이 읎어서 바다와 갯벌이/ 한번 시원히 뒤집히지 않응께 말이여/ 꼬막들이 영 시원찮다야// 근디 자넨 좀 어쩌께 지냉가/ 자네가 감옥 안 가고 몸 성한께 좋긴 하네만/ 이놈의 시대가 말이여, 너무 오래 태풍이 읍써어/ 정권 왔다니 갔다니 깔짝대는 거 말고 말여/ 썩은 것들 한번 깨끗이 갈아엎는 태풍이 읍써어// 어이 친구, 자네 죽었능가 살았능가.”(박노해, <꼬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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