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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위문편지 강요는 성폭력… 범죄 방관하는 사회에 분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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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국회 앞에 설치된 ‘위문편지 비판’ 현수막. 편지 찢는 여자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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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나 국가가 10대 여성에게 아직도 위문의 역할을 요구하고, 이 때문에 여러 범죄가 파생하는 것을 방관하는 사회에도 분노해 이번 현수막 설치 활동을 기획하게 됐습니다.”

최근 ‘OO여고 위문편지 논란’ 이후 여자 고등학교에서 군부대에 위문편지를 보내도록 한 관행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서울 시내에 현수막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들의 이야기를 24일 들었다.

위문편지 논란은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 작성자가 ‘OO여고’ 학생으로 표기된 군 위문편지 사진이 퍼지면서 시작됐다. 편지에는 “앞으로 인생에 시련이 많을 건데 이 정도는 이겨줘야 사나이가 아닐까요?”, “추운데 눈 오면 열심히 치우세요” 등의 내용이 담겼다.

편지 내용이 군인을 조롱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데 이어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편지를 작성한 학생의 신상 정보가 유출됐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성희롱 메시지와 합성 사진 등이 확산했다.

이후 ‘OO여고’ 측은 위문편지 폐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시교육청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학생들에 대한 성희롱성 게시글과 합성사진 등이 올라온 정황을 확인하고, 서울 종로경찰서에 수사를 의뢰한 상태다.

◆“위문편지 강요는 성폭력” 등 비판 현수막 제작

20∼30대 여성 7명이 모여 만든 팀 ‘편지 찢는 여자들’은 지난 17일 서울 시내 15곳에 위문편지 문화를 비판하는 현수막 16개를 내걸었다. 현수막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강남역 10번 출구를 비롯해 서울역, 서울시청, 국회, 청와대 등 앞에 설치됐다.

현수막마다 다르게 들어간 문구에는 “위문편지 완전철폐”, “일재잔재 위문편지”, “감정노동 강요하는 위문편지 폐지하라”, “군인을 위로하는 것은 여성들이 몫이 아니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논란이 된 편지를 쓴 ‘OO여고’ 재학생에 대한 과도한 신상털이, 디지털 성폭력 등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학교와 교육 당국에 대한 비판도 포함됐다. ‘OO여고’ 앞에는 “학생에게 강요하는 위문편지는 학교의 성폭력이다”, “‘OO여고’는 학생에게 사과하라” 등의 문구를 담은 현수막이 걸렸다.

‘편지 찢는 여자들’ 팀은 공동대표인 라텔과 권태랑(반성폭력 운동가), 팀원인 태평해, 해일, 쓰담, 디자이너인 주타, 맴유 7명으로 구성됐다. 공동대표 라텔은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고등학교 때 위문편지를 쓴 기억이 나는데 여전히 이 관행이 남아있다는 것에 놀랐고, 심지어 10대 학생이 사이버 성폭력에까지 노출된 것을 보며 행동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OO여고’ 학생들에 따르면 학교 측은 위문편지를 보낸 학생에 대한 스토킹, 성희롱 위험을 인지한 뒤 개인정보 기재를 금지했으나 학생들의 반발 속에도 위문편지 관행을 유지해 왔다. 이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군부대에 매년 위문편지를 보내고 봉사점수를 주는 활동으로다.

이번 논란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는 위문편지를 받은 남성이 발신인을 찾아온 사례, 답장에 콘돔을 동봉해 보냈다는 이야기, 성희롱 표현을 담은 답장을 받았다는 증언 등이 잇달아 올라오기도 했다.

◆민원 넣고 떼어가고…현수막 수난 왜

‘편지 찢는 여자들’은 위문편지 철폐 등을 요구하기 위해 이달 중순 만들어진 연대체 ‘여성결사’에서 팀원을 꾸려 독립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20대 초부터 30대 중반까지 나잇대의 여성이라는 것 외에 다른 정보는 공유하지 않았다. 여성주의 활동에 대한 공격이 심해지는 추세인 만큼 익명성을 지키며 활동을 이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라텔 대표에 따르면 이번에 설치한 현수막 역시 만 하루 만에 여러 곳에서 사라지는 등 곱지 않은 사회적 시선을 직면해야 했다. ‘OO여고’ 앞에 설치된 현수막은 양천구청에서 “지정 게시대가 아닌 곳에 설치돼 수거하는 게 방침”이라며 철거됐다. 서울시청 앞에 설치된 현수막은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 누군가 떼어 간 것으로 추정된다. 강남역 등 다른 지역에서도 현수막이 사라졌다는 제보가 속속 이어졌다.

이는 예상 못했던 일이 아니라고 라텔 대표는 말했다. 그는 “애초에 현수막의 훼손을 예상하고 제작을 진행했다”며 “여성 인권 문제와 관련해서는 늘 철거나 훼손이 잦은 일로, 전형적인 백래시(반발 현상)로 본다”고 전했다.

현수막이 ‘불법’ 게시돼 철거했다는 구청 입장에 대해서는 “옥외광고법 제8조에 따라 집회, 안내 등이 포함된 현수막은 합법이며 결사의 자유 안에서 시민의 권리”라고 반박했다. 각 구청에 곧장 민원이 제기되고 이에 따라 신속히 현수막이 철거된 것은 “단순 현수막 훼손을 넘어 여자들의 목소리를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 위해 시스템을 이용한 것으로 백래시가 더욱 강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 청소년을 보호하려는 목소리에 대한 민감하고 폭력적인 이 같은 반응이 바로 이번 현수막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라는 설명이다.

이들 팀은 현수막 설치와 함께 오프라인 집회를 병행하려 했으나 코로나 방역지침을 준수해 온라인 집회로 변경했고, 따라서 ‘집회’ 목적에 따른 합법적 게시라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 중구청은 “현장에서 집회가 진행 중인 동안에만 현수막 게시가 가능하다”며 철거 이유를 밝혔다.

◆‘위문편지 금지’, 2주만에 15만명 청원

여성들을 중심으로 온오프라인상에는 이번 위문편지 사태를 비판하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여자고등학교에서 강요하는 위문 편지 금지해주세요’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2주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15만명 가까이 참여했다. SNS에서는 #‘OO여고’는_학생에게_사과하라, #일제잔재_위문편지_완전철폐 등의 해시태그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위문편지 사안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여성결사’를 조직한 한지영 대표(신체심리학자)는 “그동안 여학생들이 개인적으로만 감당하던 위문편지로 인한 피해가 이번에 세상에 알려졌다”며 “여성 청소년이 겪어야 했던 일에 제도권이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한 대표는 현수막을 보는 사회의 불편한 시선 역시 “실재하는 남성들의 범죄에 대해 분노하고 처벌해야 할 자리에 ‘위안 역할을 거부하는 여자’를 단죄하는 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가 만든 ‘여성결사’에는 현재 교사, 간호사, 변호사, 대학생, 프로그래머 등 다양한 직업군의 여성 150명이 모였다. 위문편지 금지, 그간의 관련 피해 전수조사 등을 요구하는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며 대선 정국에서 여성들이 원하는 공약도 후보들에게 전달한다는 계획이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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