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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기자의 눈] "고층건물만 봐도 붕괴 노이로제" 광주만의 심정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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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고려 않고 분양세대 늘리기
'빨리빨리' 시공에 잦은 설계 변경
'파수꾼' 감리는 도장 찍기 바빠
부실 설계·시공·감리 '3不' 끊어야
한국일보

23일 오후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붕괴사고 현장에서 119 구조대원들이 처참하게 부서진 건물 잔해 틈을 수색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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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고층 건물을 볼 때마다 '외견상 멀쩡해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부터 들어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입니다."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현대아이파크 붕괴 현장을 취재하다가 만난 시민의 호소다. 지난해 6월 철거 도중 무너진 건물이 버스를 덮쳐 17명이 죽거나 다친 동구 학동 참사를 겪은 지 불과 반년 만에 39층짜리 신축 건물 상층부가 내려앉아 6명이 숨지거나 실종되는 사태를 맞았으니, 광주 시민들이 건물 안전에 집단적 불안을 겪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판이다. 더구나 이번 사고는 그 불안이 특정 지역만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모든 건축물은 설계, 시공, 감리를 거쳐 완성된다. 그러나 붕괴 당일인 11일부터 시작된 현장 취재에서 분명히 확인한 것은, 화정아이파크 공사는 이 세 가지 핵심 절차 모두에 심각한 하자가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자명한 사실은 이런 흠결이 국내 건설 현장에 깊숙이 뿌리박은 작업 관행과 문화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설계는 건축물의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이다. 사고 건물은 설계 과정에서 '안전성'보다 '분양 수익'에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보(슬래브를 떠받치는 구조물)가 없는 무량판 구조로 택한 점이 대표적이다. 이 방식은 보가 차지하는 만큼 건물 층고를 낮출 수 있다. 층당 10㎝만 높이를 낮춰도 30층 건물에선 3m를 확보할 수 있어 그만큼 집을 더 지을 수 있다. 다만 보가 없으니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고, 이를 보완하려면 철근으로 바닥(슬래브)과 벽체를 보다 단단히 연결하는 구조 설계가 뒤따라야 한다. 그럼에도 사고가 일어난 201동의 내력벽(수직하중과 수평하중을 구조물 기초로 전달하는 벽)엔 큰 창문이 여러 개 설치돼 철근이 정착할 공간이 부족했고, 결국 무너지는 슬래브를 붙잡지 못했다.

시공상 문제도 심각했다. 콘크리트 양생(굳힘), 동바리(콘크리트 타설 부위 지지대) 제거, 불량 레미콘 사용 등 부실 시공 정황이 여럿 드러났는데, 업계에선 '선(先)분양 후(後)시공' 제도에 기반한 '빨리빨리 짓기' 문화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라는 반응이다. 특히 사고 현장에선 시공 과정에 설계가 변경되는 일이 반복됐는데, 사고의 1차 원인으로 지목되는 덱 플레이트 방식을 39층 바닥 피트층(설비와 배관이 지나는 층) 타설 작업 때 채택한 것도 현장 판단으로 설계가 바뀐 결과였다. 전문가들은 시공의 편의성 때문에 설계를 변경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피트층은 층고가 1.5m 정도여서 동바리 설치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일체형 강판 거푸집이라 동바리를 설치하지 않아도 되는 덱 플레이트를 선택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경찰 안팎에선 덱 플레이트가 하중을 떠받치기 힘들 만큼 콘크리트가 과하게 타설되면서 결국 덱 플레이트가 연쇄 붕괴의 시발점이 됐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설계와 시공의 파수꾼이 돼야 할 감리 또한 엉망이었다. 사고 현장에서 감리는 준공 허가를 받으려 관공서에 제출할 서류에 도장을 찍는 역할로 전락했다. 한국일보가 김형동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2019년 2분기~2021년 4분기 화정아이파크 공사 감리보고서엔 "공정관리, 시공관리, 품질관리, 안전관리 등이 보통 이상으로 양호하다고 사료된다"는 평가가 적혔다. 지난해 12월 인근 203동 39층에서도 콘크리트 타설 부위 20㎡가 붕괴됐지만 감리보고서엔 기재되지 않았다. 감리업체가 지난달 피트층 안전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해놓고 조치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점은 사고를 막을 마지막 기회마저 날린 형국이라 특히 뼈아프다.

이번 사고는 부실설계-부실시공-부실감리의 삼박자가 빚어낸 결과다. 3불(不)의 고리를 끊지 않는다면 참사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한국일보

김도형 기자



광주= 김도형 기자 nam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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