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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661] 너무 큰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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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에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만~25만년 전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역사 거의 대부분 동안 존재감조차 없던 지극히 하찮은 한 종의 영장류였다.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던 시절에는 기껏해야 600만~1000만명 정도가 지구 전역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다가 불과 1만여 년 전 농경을 시작하며 폭발적으로 숫자가 늘어 오늘에 이른다.

농경을 시작하기 전 지구 생태계에서 인간의 존재감은 어느 정도였을까? 당시 인간의 무게와 기르고 있던 개와 고양이의 무게를 다 합해본들 포유류와 조류 전체 중량의 1% 미만이었다. 그러나 지난 1만여 년 동안 농업 혁명, 산업 혁명, 정보 혁명 등을 일으키며 어언 80억명에 육박하는 인류의 무게와 우리가 기르는 가축 전체의 무게를 합하면 비율은 무려 96~99%에 달한다. 지구 생명의 역사에서 일찍이 이런 반전은 없었다.

‘지구에서 가장 큰 발자국’이라는 책이 번역돼 나왔다. ‘80억명의 인간을 한데 모아 1명의 거인을 만들면?’이라는 기발한 발상으로 쓴 책이다. 키가 무려 3㎞이며 몸무게가 2억9000만톤에 달하는 이 거인은 1년에 나무 150억그루를 베고 1초에 수영장 크기만큼 땅을 파헤쳐 돌, 모래, 광물, 화석연료 등을 꺼내 쓴다. 매년 달걀 1조3000억개를 먹어 치우고 우유 8400억리터를 들이켠다. 그나마 깨끗이 먹으면 좋으련만 만든 음식의 3분의 1을 그냥 내버린다.

코로나19도 결국 이 엄청난 생물 다양성 불균형이 야기한 재앙이다. 야생동물의 몸에 붙어 사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불안함을 못 이겨 이주하면 거의 확실히 ‘80억 거인’이나 그가 기르는 가축의 몸에 내려앉는다. 거인이 지구 표면에 찍는 생태 발자국이 너무 크다. 거인이 오줌 한 번만 싸도 베네치아 운하가 범람할 지경이니 더 말해 무엇하리. 그나마 뭉치면 1000만톤에 달하는 80억 두뇌에 기대를 걸 뿐.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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