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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나라 곳간’은 없다, 집단 책임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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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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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 후보 모두 대규모 재정 지출을 가져오는 공약들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한쪽에서는 나라 살림 거덜내는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으며, 다른 쪽에서는 무작정 자신들이 주장하는 의제를 내걸면서 국가 재정 지원을 요구하는 이들이 쏟아진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나라 곳간’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지겹게 되풀이된다. 이를 멈추기 위해 몇 가지 사항을 분명히 해두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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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나라 곳간’이란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열었던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경제 정책에 남겨놓은 최악의 유산은 ‘나라 살림이나 집안 살림이나 똑같아서 수지 균형이 최고’라는 잘못된 생각을 마치 경제 법칙처럼 통용되게 만든 것이다. 이는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상식을 고의적으로 이용하는(혹은 악용하는) 역사상 최고의(혹은 최악의) 정치적 수사학일 뿐이며, 국가 재정이라는 것이 곧 왕실 재정을 뜻하는 전근대 사회에서만 통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17세기 이후의 근대 금융 재정 시스템의 진화 과정에 대해 아니면 현행 금융 통화 제도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라도 가지고 있는 이라면 국가의 재정은 중앙은행을 매개로 나라 전체의 통화 및 금융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인프라’라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정부 지출 확대를 반대하는 일반의 정서는 그것을 받아 챙겨서 배불리는
‘분배 동맹’들의 존재에 따른 불신의 경험칙이 큰 원인이다

재정이 국왕 개인의 재산 즉 ‘곳간’이라면 이를 과도하게 비우거나 채우는 것 모두가 신민들에게는 위험한 짓이 되며, 균형 재정의 고전적인 논리도 이 시절에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국가 재정은 ‘곳간’이 아니다. 국가 경제가 해외 부문과 중장기적으로 공간적인 균형을 취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금융 행위의 중심이며,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유지한다는 과제를 몇 세대에 걸쳐서 달성할 수 있도록 시간적인 균형을 매개하는 금융 행위의 중심이므로, ‘곳간’이 아니라 채권과 채무를 자의적으로 발생시키고 또 청산하는 ‘장부’에 불과하다. 따라서 경제 나아가 사회 전체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과감한 적자 혹은 흑자 재정을 몇 년 혹은 그 이상 편성할 수 있는 재량의 영역이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가장 강력하고 결정적인 무기이다. 은행이 아무런 저축이 없어도 얼마든지 대출을 해줄 수 있는 기관이라는 슘페터의 지적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적자 재정과 국가 부채는 ‘미래 세대에 과도한 부담을 떠넘기는 것’이라는 억설은 터무니없는 일방적 주장이다. 좋은 예인지는 모르겠으나 쉬운 예를 들자. 지금 당장 ‘영끌’을 해서라도 좋은 집 한 채 남겨주는 부모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절대 부채는 지지 않겠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는 부모가 될 것인가? 부모가 큰 병이 들었을 때 빚을 지더라도 치료비를 조달하여 집안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일찍 죽거나 인사불성이 되어 집안을 황폐하게 만들 것인가? 나라의 예를 들어보자. 산업 시스템은 물론 생태 위기라는 거대한 도전이 닥쳐오면서 지구적 산업 문명 전체가 거대한 전환을 겪고 있는 지금, 산업과 사회의 업그레이드와 미래 세대의 역량 강화를 위해 과감하게 적자 재정을 편성할 것인가 아니면 균형 재정을 고집하다가 소수의 승자들을 제외한 산업 구조의 노후화와 사회 전체의 쇠락이라는 결과를 다음 세대에 넘겨줄 것인가? 이는 협의의 금융이라는 시장과 영리의 논리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종류의 자금 ‘융통’이다.

전환기인 지금 과감한 확장 재정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지출의 양이 아니라 질과 내용에 대해
세세히 계획을 짜 ‘분배 동맹’에 대한 불신을 풀어야 한다

지출 결과 사후 평가 방법도 중요

이러한 국가 대계 차원에서의 과감한 재량적 자금 ‘융통’이 재정의 본질이다. 대처 여사의 말에 더 이상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나라 살림은 집안 살림이 아니다. 국가 재정은 균형 상태를 유지하라고 존재하는 게 아니다. 지금 세상과 미래 세대의 행복을 위해 국가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를 먼저 결정하고, 그에 따라 중장기적인 채권과 채무를 조정하는 고도의 정치적 과정이다.

지금 대선 후보들이 대규모 재정 지출을 수반하는 공약을 발표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현재가 생태, 지정학, 산업, 사회 모든 분야에서 큰 전환기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대규모 지출의 ‘뉴딜’이 필요하다는 진실을 후보들이 받아들여 고루한 균형 재정의 틀을 과감히 벗어나고 있다는 긍정적인 증후라고 읽힌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마음속에는 무언가 불안하고 찜찜한 감정이 남는 게 사실이다. 그럴 법하다. 이 또한 충분히 심각한 현실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로 재정 지출 확장에 따라오는 ‘분배 동맹’의 문제이다. 즉 국가 예산이 지출될 때 어제도 그제도 항상 그걸 받아먹던 똑같은 자들이 이번에도 똑같이 아니 훨씬 더 큰 몫을 챙겨가게 될 것이라는 게 우리의 불길한 직감이다. 누가 현대 자본주의를 시장경제라고 부르는가. 정부의 지출은 경제 전체 GDP 규모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정부 지출과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문까지 생각한다면 그 비중은 최소한 절반에 가까울 것이니 혼합경제라는 이름이 마땅하다. 이 국가라는 엄청난 화수분은 지난 70년 대한민국 역사상 착실히 형성되어 온 가지가지의 ‘분배 동맹’들이 촘촘히 감싸고 있으며, 이는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도 정도는 달라도 마찬가지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뒤집자면, 국민의 혈세로 모인 국가 자원에 촉수를 깊이 박아 빨아먹는 집단들이 정부 부처마다 꽁꽁 감싸고 포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지출 과정의 정당성과 투명성을 최대한 확보할 때에만
민주주의 국가의 확장 재정은 지속 가능하다

과감한 자금 ‘융통’이 재정의 본질

물론 이러한 집단들의 존재는 입증하기도 어렵고 명확히 규정하기도 어려운 ‘어둠의 영역’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칙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나랏돈이 풀리면 그게 풀리는 경로, 그게 전달되는 손들의 순서라는 게 거의 정해져 있으며, 혜택의 크기도 그 순서에 따라 정해져 있다는 것을. 그 말단에 위치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연줄 없는 이들에게는 아주 일부만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 지출이 본래 명분으로 내건 사회 전체의 편익과 발전이라는 목표는 뒷전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정부의 지출 확대를 반대하는 일반의 정서는 대처 총리식의 엉터리 경제학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생활 세계에서 느낀 이러한 ‘분배 동맹’들의 존재, 따라서 정부의 지출이 확장되어 봐야 그거 받아 챙겨서 배불리는 이들은 따로 있다는, 그래서 자기들 본인에게나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나아질 것은 별로 없을 것이라는 경험칙이 더 큰 원인이다. 이 ‘분배 동맹’들은 익히 알려진 대기업 대자본이나 정부 부처 이름을 앞글자로 한 무슨무슨 ‘~피아’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 아래에 딸린 크고 작은 무수한 집단과 단체와 무리들이 존재하며, 국가가 푼 국민의 혈세는 여기에서 싹 털린다는 불신이 팽배해 있다.

전환기인 지금 과감한 확장 재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적·사회적으로 마찰 없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항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첫째, 얼마를 풀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에 왜 풀어야 하느냐가 중요하다. 에너지 전환이나 불평등 해소와 같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명분에 안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슨 사업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사회 전체의 후생을 증대시키는가를 세세히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20세기의 ‘사생아’ 케인스주의의 악영향으로 항상 정부 지출은 총수요 관리 차원에서 규모와 액수만 논의되어 온 문제가 있다. 지금은 지난 반세기 동안 축적된 ‘분배 동맹’에 대한 불신을 풀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지출의 양이 아니라 질과 내용에 대해 세세히 계획을 짜야 한다.

둘째, 이러한 지출의 결과를 어떻게 사후적으로 평가할 것인가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정부 지출은 좁은 의미의 금전적 수익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사회적 수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거니와, 이를 어떻게 반성하고 평가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이를 지출의 계획과 연계시켜야 한다. 셋째, 국가 자원이 구체적으로 지출되고 행사되는 과정에 대한 투명한 거버넌스와 수혜 단위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다원화’이다. 지금까지의 거버넌스라는 것이 결국 관련된 똑같은 이해집단 내부 인사들의 알음알음 노릇에 그쳤다는 비판을 기억해야 한다.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지출 과정의 정당성과 투명성을 최대한으로 확보할 때에만 민주주의 국가의 확장 재정은 지속 가능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 기획재정부에 집중되어 있는 지출의 계획과 예산 작성의 기능을 분리하여 전자를 민주주의 국가와 거버넌스의 원리에 따라 다원화할 필요가 있다.

‘나라 곳간’이란 없다. 집단적 책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실현해 나가는 21세기형 국가와 사회가 있을 뿐이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대안적 사회의 정치경제 질서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 왔다.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국제칼폴라니 연구협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위기 이후의 경제학> <비그포르스, 잠정적 유토피아와 복지국가>가 있으며, 역서로는 <도넛 경제학> <21세기 기본소득> <균형재정은 틀렸다: 현대화폐이론 입문> 등이 있다.


홍기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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