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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한국에선 맞아도 중국에선 틀린 실용외교 [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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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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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실용주의 외교를 천명했지만, 이보다 앞서 이명박 전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 '실용주의'를 기치로 내걸었고 '창조적 실용주의 외교'를 표방했다. 당시 중국에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 특집 기사를 준비하는 중국 기자가 내게 물어왔다. "중국에서 실용주의는 좋은 뜻이 아닌 경우가 많은데 왜 이런 표현을 썼죠?" 실용주의 단어는 중국에서 이기적인 '기회주의'란 뜻으로도 쓰인다는 것이었다.

문학을 가르치는 중국 교수에게 문의하니, 웃으며 설명해줬다. 예를 들어 "이 사람 참 실용주의자네"(这个人真是实用主义者啊)라고 말하면 실은 '이기적'이라고 비꼬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관점에선 한 국가의 국정철학, 특히 외교정책 철학을 표방하는 단어로 쓰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했다.

실용주의가 어떻게 쓰이는지 또 하나 예를 보자. 지난 2013년 시진핑 국가주석은 신입 공산당 중앙위원 연수반 개학식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우리 공산당원의 원대한 목표를 잃으면 방향을 잃고 공리주의, 실용주의로 변질된다."(如果丟失了我們共產黨人的遠大目標,就會迷失方向,變成功利主義、實用主義. 2013.01.05.) 이 경우에도 '실용주의' 단어가 부정적인 문맥으로 쓰였다.

중요한 건, 중국 언론이 한중 관계가 삐걱거릴 때마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서사할 때 종종 '실용주의' 단어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실용주의는 이명박 정부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국정 강령이었고, 중국언론은 그를 원칙 없이 이익을 좇는 인물로 깎아내린 것이다. 이명박 정부 외교 구상의 또 하나 슬로건이 '포괄적 실리외교'였기 때문에 오해를 사기에 더없이 좋았다.

당시 한국 정책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대중국 외교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사례로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첫 이미지' 구축에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를 인지한 당시 한국 정부의 한 인사는 한국에서는 실용주의라 쓰지만, 중국어로 표현할 때는 '무실주의'(務實主義)라고 했었어야 했다고 뒤늦게 안타까워했다. 중국에서 '무실주의'는 미국의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지칭할 때 주로 쓰인다.

개인적으로 추천하고픈 단어는 '실사구시'(實事求是)다. 한국어 의미와 중국어 맥락이 가장 가깝다. 한국어는 '실용주의'라고 그대로 쓰고, 중국어로 번역할 때는 '실사구시'라고 표기하면 될 것이다. 이런 것쯤 중국 언론이 '다 알아서' 이해하고 번역해 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내가 번역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번역당한다'. 국정 슬로건처럼 중요한 단어는 한 번 잘못 번역되면 계속 그렇게 사용된다.

한국과 중국은 서로 잘 아는 듯해도 이처럼 다른 점이 많다. 이재명 후보는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하니, 국정 슬로건 번역도 상대방 처지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러한 디테일에 강한 외교가 실제로 가동되는 것을 대한민국 외교에서 본지 꽤 오래된 듯하다.

요즘 시중에서는 이재명 후보가 당선되면 문재인 정부와 유사한 대중국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이러한 우려는 근거가 있다. '가장 친중적'이라는 평을 들었던 정부이고, 또 가장 많은 친중 인사들이 포진해있다는 문재인 정부에서 대체 왜 한중 관계가 가장 최악이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실용적 외교를 하려다 원칙 없게 보인 점은 없는지, 중국 문화와 중국인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한 외교 내막이 있었는지 점검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한국일보

이성현 조지 H.W. 부시 미·중관계기금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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