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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자유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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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연말정산 공제액 확대 등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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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내가 생각하는 미국 보수 정치의 문제 중 하나는 낙태는 무조건 반대하면서 총기 소유는 허용하는 것이다.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든 산모의 건강이 위험하든 배아가 세포분열 중인 단계부터 생명은 그토록 소중한데, 이미 태어난 사람들을 총으로 쏴서 죽이는 것은 괜찮다는 말인가? 민간인의 무장해제와 군대와 경찰로의 무력 집중은 근대국가 형성의 기본이다. 어쨌든 어떤 이에게 총기 소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살아갈 자유가 제약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자유와 자유가 대립하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한 풍경이다. 일단, 재벌 기업가가 주가 하락을 감수하면서도 멸공을 주장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하는 이십대 남성을 주 지지층으로 얻고자 하는 보수 야당에서 함께 멸공을 외치는 것은 모순이다. 이 작은 나라에서 전쟁이라도 발발하면 월급 이백만원이 무슨 소용인가. 누가 가장 먼저 생명을 잃을 위협에 처하는가. 멸공을 외칠 자유는 군대의 규모와 복무기간을 줄이고 평화롭게 공존할 자유를 훼손한다.

보수가 자유를 좋아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보수의 자유는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확장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보다는 국가의 강제로부터 사유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자유롭게 시장경제 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소극적이고 특수한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 모르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자유의 의미를 염두에 두면, 중도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점점 더 유사해지고 있는 정당 간 공약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하고자 하는 일이 과연 누구의 어떤 자유를 증진하는가에 집중하면 된다.

예를 들어, 연말정산 소득공제 확대는 일정 소득 이상의 소비력이 높은 가구에 도움이 된다. 조세부담률이 낮아져 중산층 이상의 경우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있는 자유가 늘어나지만, 그만큼 세수 부족으로 소득지원이나 사회서비스에 의존하는 계층의 자유를 줄인다. 세금을 걷지 않아 재정이 줄어드는 것이 공적 지출을 통해 그렇게 되는 것과 결국은 마찬가지란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공공부조 위주의 작은 자유주의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미국의 경우 2017년 기준 공적 사회지출 순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하위권인 21위였으나 소득공제 같은 위장된 지출까지 모두 합산한 이후에는 무려 2위로 뛰어오른다.

아이를 낳은 부모에게 일년간 천이백만원의 수당을 지급하겠다는 공약도 유사하다. 가장 어려운 형편의 청년들은 일단 결혼하기도 어렵다. 자랄수록 더 많은 양육비가 필요한데, 그것을 일년으로 제한한 이유도 불분명하다. 우리나라 사회보험과 각종 수당의 역진적 효과를 고려한다면 청년 기본소득이 더 나은 정책이다. 결혼 여부와 자녀 수와 무관하게 동일한 수준의 지원을 하지만, 같은 액수라도 더 형편이 어려울수록 더 큰 도움이 된다. 멸치와 콩을 좋아하는 누구에게는 외식비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가난한 청년에게는 잠시나마 아르바이트의 방해 없이 취업을 준비할 자유를 줄 수도 있다.

시장에서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자유는 다른 누군가의 임금소득을 하락시켜 그가 누려야 할 자유시간의 질을 낮춘다.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누군가의 세금을 감면해주면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이 최소한의 복지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자유가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시장에서 규제 없이 기업할 자유는 아파트도 붕괴시키며, 무엇보다도 노동자가 온전히 신체를 유지하고 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를 침해한다.

지성으로 현실을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미래를 낙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안토니오 그람시와 앤드루 솔로몬의 말을 잊지 않고 싶다. 그러나 자유와 멸공과 무속의 모순적 결합이 주는 깊은 좌절감은 한동안 사라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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