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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실험예술 한길 80세 …'이건용 현상' 세계적 갤러리도 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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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미술계 '이건용 열풍'

페이스갤러리와 전속계약

군산서 38년 작업 지속해

홍콩 페이스 개인전 개막

컬렉터들 줄줄이 대기 중

"나의 예술 믿고 여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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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 바디스케이프 76-2-2021, 2021 acrylic on canvas 162.2 x 130 x 4 cm. [사진 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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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 퍼포먼스 영상 '이어진 삶' (Relay Life, 10분 40초)의 한 장면. [사진 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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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삼송 테크노밸리에 자리한 이건용 화백 작업실의 ;바디스케이프' 작품.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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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홍콩 페이스 갤러리에서 국내 1세대 행위예술가 이건용(80) 개인전이 개막했다. 작가의 대표 연작 회화 '바디스케이프(Bodyscape)' 신작부터 퍼포먼스 영상 작품세계를 폭넓게 소개하는 전시다.

이번 전시는 의미가 더 각별하다. 세계 미술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랑 중 하나인 페이스가 한국 작가 중 이우환에 이어 이건용과 전속계약을 맺고 여는 첫 전시여서다. 페이스는 서울을 비롯해 뉴욕 두 곳과 런던, 제네바 등 전 세계 9곳에서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페이스는 개막에 앞서 전속 계약 소식을 알리며 "앞으로 미주와 유럽 지점에서도 이건용 화백의 작품을 선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국내외 미술계에서 위상이 가장 크게 달라진 작가 한 명을 꼽는다면 단연 이건용이다. 지난해 9~10월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에서 전시작이 완판됐고, 지금도 그와 공식 관계를 맺고 있는 갤러리 현대와 리안 갤러리엔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린 컬렉터가 수 십명에 이른다. 올해 그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특별 기획전에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른바 '이건용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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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삼송 작업실에서 바디스케이프 작품 앞에 선 이건용 화백.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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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 바디스케이프 76-1-2021, 2021 © Lee Kun-Yong, [사진 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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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은 1970년대부터 퍼포먼스, 조각, 설치, 영상을 넘나들며 작업해온 한국 행위예술 선구자다. 지금 컬렉터들이 환호하는 대표 연작 '바디스케이프'는 보통 화가들이 하듯이 캔버스를 앞에 놓고 그린 그림이 아니다. 이른바 신체 드로잉, 몸의 움직임을 기록한 퍼포먼스의 결과물이다. 그는 '바디스케이프'와 같은 퍼포먼스를 수십 년간 이어왔다. 만 80세가 되는 해에 세계 무대로 초대를 받은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Q : 페이스와 전속계약 했다.

A : "생애 처음 경험하는 일이니 어떻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계약에 서명하는 과정이 굉장히 복잡하더라. 그들은 이건용의 '촌놈' 기질 때문에 더 힘들었을 거다. 내가 뭘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틀을 뛰어넘어보고 싶어서 국내 갤러리 두 곳도 같이 가자며 고집부리고 그랬다."

Q : 국내 두 화랑과 함께한 것도 2016년부터다. .

A : "내가 군산에서 산 시간만 38년이다. 주목받지 못해도 내 예술 행위의 가치를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다. 사람들이 나를 모른다는 것에 대해 분노하거나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내가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것, 새로운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가난하고 형편없이 살아도 우리 아들딸은 항상 명랑했다. 네 살 꼬마 아들이 길바닥 돌멩이만 봐도 "작품!"이라고 외칠 정도로 작업이 일상생활이었다. 힘들지 않았다."

Q :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아주리라고 믿은 건가.

A : "믿었다, 확실하게 믿었다. 1973년 파리 비엔날레 갈 때 비행기 표 살 돈이 없어 홀트양자회에서 유럽으로 입양되는 어린이 2명을 데려다주는 조건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그때도 내 예술에 대한 자신감은 있었다."

파리 비엔날레 당시 이건용은 큰 나무 밑동과 흙을 전시장에 통째로 옮겨놓은 높이 2.5m의 설치작품 '신체항'을 선보였다. 그가 경부 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지나다가 뿌리째 뽑힌 나무를 발견하고 집에 가져온 데서 시작된 작품이다. 그는 '신체항'에 대해 "예술은 무엇이고, 예술품은 무엇인가를 물은 작품이었다"고 설명했다.

이건용은 황해도 사리원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7년 홍익대를 졸업한 뒤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ST (Space and Time)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1975년 '다섯 걸음'(국립현대미술관), 1979년 '이어진 삶' (상파울루 비엔날레) 퍼포먼스를 벌였다. 또 30여 년 국립군산대 교수로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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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의 신체드로잉 연작 중 하나인 '바디스케이프 76-1'은 작가가 캔버스 뒤에 서서 팔을 뻗어 수직으로 붓을 아래로 내리며 굿는 작업으로 완성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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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몸으로 그리는 '바디스케이프'가 유명하다.

A : "눈으로 보지 않고 몸이 그린 것, 내 몸 움직임의 흔적이다. 내 키와 팔길이 등 신체의 제약이 자연스럽게 만나 이리저리 틀을 벗어나기도 하고 평균치도 있고 중첩된 선들이 작품이 된 거다."

작업 과정을 보지 않은 사람에겐 '하트' 그림으로 통한다.

A : "몸과 아크릴 물감, 그리고 캔버스가 어떻게 만나는가를 보여주며 기존 미술 개념과 관점을 달리한 것을 알리는 게 내 뜻이었다면,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해나 해석은 오롯이 보는 사람의 몫이다."

Q : 작업에서 몸을 가장 중요한 요소다. 왜 몸인가.

A : "죽으면 몸은 썩고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는 몸의 차원에서 산다. 예를 들어, 신이 그저 저 위에 존재하며 인간에게 메시지만 보냈다면 아무 의미 없었을 거다. 인간의 몸을 가지고 왔고 몸을 십자가에 박히며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나. 우리가 영(靈)의 세계에서만 놀고 있으면 이 세상 문화나 경험이 아니다. 몸을 가지고 예술을 만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Q : 어머니께서 의사가 되길 원하시며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 했다고.

A : "어머니 말씀 때문에 예술의 쓸모가 내 평생의 화두였다. 현대인들은 모두 자기 방에 갇혀 있는데, 난 예술은 서로 교감을 할 수 있게 매개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예술은 쓸모 없어 보이는 일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며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의사가 되지 않았지만, 후회 없다."

지금 왜 '이건용 현상'이 일어났다고 보나.

A : "나는 그동안 기존 울타리 안에 있지 않았다. 항상 바깥에 머물고, 바깥에서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할 수 있었다. 미술도 그렇지만, 해결책을 찾으려면 밖에서 봐야 한다. 한국 정치도 국회의원들이 국회 밖에서 정치판을 봤으면 좋겠다."

Q : 앞으로 계획은.

A : "난 이제 여덟살일 뿐이고(웃음), 아직 실현하지 않은 아이디어가 많다. 더 과감하게 하고 싶었는데 미친놈 소리 들을까 봐 풀어놓지 못한 것들이 꽤 있다. 그것들을 슬슬 풀어놓으려 한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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