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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더오래]내돈 내고 걷는 ‘삼주만 해볼까 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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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전명원의 일상의 발견(23)



‘삼주만 해볼까 챌린지’에 참가했다. 말 그대로 3주간 3㎞ 이상을 걷고, 30페이지 이상 읽은 책을 매일 인증하는 모임이다. 참가비를 낸다. 3주간 15일 이상을 인증하면 책 한 권을 준다. 10일 이상 인증 시엔 음료권이 있다.

“돈까지 내가며 걷는다고?” 지구 반대편의 언니는 한국의 낯선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 돈까지 내가며 걷는 희한한 챌린지는 요사이 은근 주변에 많다. 만보 걷기, 책 읽기, 심지어 쓰레기 줍기 챌린지도 하니 바야흐로 챌린지의 시대인지도 모를 일이다. 돈을 냈으니 걸어야지, 챌린지 달성하면 책을 준다니 해야지…. 이런 마음이 없을 리는 없다. 그런데 이게 ‘챌린지’라는 이름이 붙게 되자 그런 것과 별개로 어느 만큼 자발적인 강제성을 띄며 의욕이 붙기 시작했다.

중앙일보

겨울 아침 공기는 차갑지만 청량하다. 젊은 아기엄마는 언젠가 팬더믹의 가운데를 통과하던 추운 겨울 아침을 떠올릴 것이다. 나도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오전 한때 그렇게 걸었다. [사진 전명원]



작년 1월 세탁기까지 얼려버리던 강추위 속에서 만보 걷기를 시작한 나였다.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이글대는 한여름 잠깐을 빼고는 참 열심히 걸었다. 가장 걷기 좋은 봄가을도 있었다. 겨울이 다시 와도 나는 잘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시작이 그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내리는 눈 속에서 잘 걸었던 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겨울에 시작하는 것과 시작한 이후 다시 겨울을 맞는 느낌이 달랐다. 추워지자 꾀가 났고, ‘이불 밖은 위험해’를 외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눈 속에서도 걷던 시작의 설렘이 사라지고, 처음의 의욕이 사라진 탓이었을까. 그렇게 겨울이 되면서 나의 동네 산책은 일주일이면 한두 번을 겨우 할까 말까 한 정도가 되었던 요즘이었다.

챌린지라는 이름이 붙자 다시 새로운 시작의 느낌이 든 것은 사실이다. 어쨌거나 양말을 신고, 두툼한 옷을 껴입고, 모자를 쓰고 집 밖을 나섰다.

오전에 동네를 걷다 보니 어린이집을 가는 아이들이 올망졸망 엄마 손을 잡고 서서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똑같은 가방을 메고, 안쓰럽게도 작은 마스크를 하나씩 끼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장난을 쳤고, 젊은 엄마들은 아이 손을 잡은 채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팬더믹 속에서도, 겨울의 강추위 속에서도 이어지는 일상의 모습이었다.

오래전 딸아이가 아기였을 때 천안으로 이사해 잠시 살았다. 나는 부모와 떨어져 살아 본 적이 없었다. 결혼해서도 친정 근처에 살았으므로 첫돌도 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천안으로 이사해 살았던 시기는 내가 유일하게 부모 곁을 멀리 떠나 살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부모 곁을 떠난 빈자리는 이웃이 채워주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엔 아이들 친구가 부모들 친구로 이어진다는 말이 맞았다. 딸아이 또래의 아기 엄마들을 만났고, 함께 아이를 키웠다. 그렇게 네 아이는 함께 자라고, 친구들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놀았다. 함께 놀았고, 간혹 싸웠고, 다 같이 세발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질주했다. 자라며 어린이집도 모두 함께 다녔다.

나는 오후에 과외수업을 했다. 내가 수업하고 있는 동안 딸아이는 자기 방에서 그림책에 낙서하며 놀았다. 나를 흉내 내느라 온통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려놓기도 했다. 더러는 내가 수업할 동안 심심하게 혼자 방에서 놀고 있을 아이를 생각한 이웃들이 데려가 자기 아이와 함께 자전거를 태우고, 모래 놀이를 하며 돌보아 주었다. 그 시절 천안에서의 한때는 이웃공동체이며, 육아공동체이기도 했던 따뜻한 사람들과의 한 시절이었다.

오늘 아침 만났던 젊은 아기 엄마들처럼 우리도 아침이면 아이들 손을 잡고 셔틀버스를 기다리며 아파트 입구에서 함께 웃었다. 버스에 타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고, 누군가의 집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기도 했던 아침이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며칠 동안 기온이 뚝 떨어진 겨울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겨울 아침 공기는 차가웠으나 청량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깔깔거리는 아기들을 바라보니 웃음이 났다. 아이는 자라고, 젊은 아이 엄마는 언젠가 팬더믹의 가운데를 통과하던 추운 겨울 아침을 떠올리며 그리워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오전 한때 그렇게 걸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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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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