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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드라마 몇 초 위해 목 꺾여 죽은 말 '까미'…해외선 말 촬영 가이드라인만 '34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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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동물 이용한 촬영 현장서 '소품' 취급 빈번, "잠 못 자게 찌르기도"…동물보호단체 "동물을 위한 안전조치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드라마 장면 단 몇 초를 위해 달리다, 강제로 고꾸라진 말 '까미'. 이를 두고 제작진은 '사고'라 표현했고, 동물보호단체는 '학대'라고 고발했다. 까미는 결국 숨졌다./사진=동물자유연대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7회 촬영 현장, 그리고 말에서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은퇴한 까만 말 '까미'는 예전처럼 인간을 위해 달렸다. 한때는 이기기 위한 경주를 하려 경마장을 한껏 내달렸었다. 그러나 이번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발목에 와이어가 묶여 있었다. 십여 명의 성인들이 까미 다리를 묶은 줄을 잡아당겼다. 까미는 목이 꺾여 고꾸라졌다. 늘 그랬듯, 달리려 했던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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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KBS 태종 이방원 드라마 中


까미는 부상을 입은지 1주일만에 숨졌다. 말은 매우 예민한 동물이기에, 예견된 결과였다. 동물권행동 카라는 "말의 신체 특성상 다리 골절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사고"라며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화 기관에 문제가 생겨, 생명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고 했다. 제작진은 20일 공식 입장을 통해 "사고를 방지하지 못하고 불행한 일이 벌어진 점을 사과한다"고 했다. '사고'라고 표현했다.


'사고' 아닌, 명백한 동물학대…"CG나 모형 사용토록 권장 추세"

영화 '브레이브하트'에서의 낙마 장면. 실제 말 대신 모형을 썼다./사진=동물권행동 카라단 몇 초의 드라마 장면을 위해, 강제로 말을 넘어트려 숨지게 한 걸 '사고'라 할 수 있을까. 동물보호단체들은 KBS 제작진 측을 '동물학대 사건'이라 규정하고 고발했다. 동물보호법 제8조 제2항(도구를 이용해 동물에게 상해를 입히는 행위)을 위반한, 명백한 동물학대라는 거였다.

특히 드라마 촬영시 이뤄진 동물학대는 '도박·광고·오락·유흥을 목적으로 동물에게 상해를 입히는 행위'이기 때문에, 동물보호법 제2항 제3호도 위반한 거라고 했다.

동물권행동 카라는 관련 장면을 촬영할 경우, "예민한 말의 특성을 감안해 CG(컴퓨터 그래픽)나 모형을 사용토록 권장하는 추세"라고 했다. 스트레스 유발을 최소화하고,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카라가 국내 영화 촬영 및 방송 관계자를 취재한 바에 따르면, 대체로 경주마에서 은퇴하거나 경기 성적이 좋지 않은 말들이 관행처럼 촬영 현장에 동원돼 온 것으로 나타났다. 태종 이방원을 촬영하다 숨진 까미처럼 말이다.


"새벽 내내 잠을 못 자게 말을 찌르기도"…동물을 '소품'으로 취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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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CG를 쓰지 않고, 실제 말을 넘어트리는 방식을 쓴 걸까.

카라가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 마련을 위해 2020년 6월 미디어 종사자 15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58.5%는 "CG 장면 연출을 고려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유로 "예산 부족(41%)" "CG로 구현하기 어려운 장면이어서(33%)" 등을 꼽았다.

촬영 현장서 동물이 스트레스 받았단 점에 대해선 59%가 "그렇다"고 했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촬영 중 놀란 말을 멈추기 위해 전기충격기를 썼다", "새벽 내내 잠을 자지 못하도록 말과 토끼를 일부러 찔렀다", "말이 갯벌로 나가야하는데 움직이지 않자, 조련사가 승마장을 돌며 매질을 가했다"고 했다.

출연 동물의 안전에 대해서도 61%가 "위험하다"고 답했다. 한 응답자는 "동물 사용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감독 A는 개를 죽이는 장면을 굳이 넣었고, 최소한의 특수 분장과 CG를 권했지만, '그만큼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될' 장면이라 여겼다"고 했다. 결국 촬영 당시 개를 사육장에 가두고, 목덜미를 계속 잡고, 가짜 칼로 위협당하는 장면을 찍었다.

말 출연 영화를 찍은 또 다른 스텝도 "동물 촬영 시간, 휴식 시간에 대한 정해진 규칙이 없었다"며 "촬영 전후, 촬영시 좀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미국에선 말 촬영 가이드라인만 '34쪽' 달해…"K컬쳐 격에 맞는 동물보호제도 정착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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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를 숨지게 한, 말 다리에 와이어를 묶어 넘어트리는 방식은 1930년대 헐리우드에서 쓰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방식으로 말 수십 마리가 숨지자, 미국 인도주의 협회(American Humane Association)는 '어떤 동물도 해를 입지 않았다'는 제목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2015년에 발간된 해당 가이드라인을 살펴보니, 그 내용만 무려 132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상세했다. 8가지 챕터에 걸쳐 동물 촬영의 대원칙, 수의사 케어 방법, 제작진의 체크리스트, 문제 해결 방법, 안전성 확보, 특수효과, 동물별 구체적인 가이드라인 등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KBS가 제대로 된 동물 촬영 가이드라인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영화 '브레이브하트'에서의 낙마 장면. 실제 말 대신 모형을 썼다./사진=동물권행동 카라말을 촬영하는 가이드라인만 살펴봐도 34페이지에 달했다. 전반적인 것부터 총격, 대포씬 등 촬영 방법과 성격과 장소에 따라 상세하게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이 담겼다. 이 같은 가이드라인을 준수한 뒤, 영화 엔딩 크레딧 등에 '어떤 동물도 촬영 과정에서 해를 입지 않았다(No animals were harmed)'고 넣는 것이다.

카라는 "경찰 고발을 통해 법적 책임을 묻고, 어느 동물도 해를 입지 않게 안전한 동물 촬영 가이드라인 마련과 준수에, 방송사의 실질적 노력을 촉구할 계획"이라고 했다. 동물자유연대도 "말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방송 촬영을 위해 빈번하게 발생하는 동물 학대를 막고, 동물을 위한 안전조치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김성호 한국성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영상 제작시 동물 보호는, 동물 뿐 아니라 사람의 안전한 환경도 조성하게 한다. 동물권이 신장되면 인권은 더 신장된다""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등 K 문화의 격에 맞는 수준의 동물보호제도와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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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진 말 '까미'를 기억하며, 촬영 동물 복지 개선을 외치는 이들의 청와대 국민청원. 링크 주소는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603946?navigation=best.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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