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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야만의 정복자’ 미국, 인디언 잔혹사는 지금도 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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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_ 그림 속 아메리칸 인디언

유럽 백인이 ‘발견한 신대륙’에서

원주민 약탈하고 쫓아낸 역사를

그림에서 선민사상·문명화로 미화

지금도 제 목소리 내면 탄압 여전


한겨레

테오도르 갈레, <아메리카>, 1600년대, 동판화, 엘리샤 휘틀지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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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캐나다 원주민(아메리칸 인디언) 기숙학교 터에서 어린이 215명의 유해가 발견돼 총리가 “캐나다의 부끄러운 역사”라며 사과한 일이 있었다. 과거 캐나다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도 원주민 어린이를 가족과 강제로 떼어놓은 뒤 기숙학교에 집단 수용했고, 백인 사회 동화를 위해 원주민 문화 말살 정책을 폈다. 이 과정에서 육체적·정신적·성적 학대 등의 심각한 인권침해가 자행됐고, 많은 어린이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백인들은 왜 이다지도 집요하게 원주민 문화를 없애려 애썼던 걸까.

“하느님께서 주신 이 대륙”

1492년 콜럼버스가 발을 내디딘 이래, 아메리카 대륙으로 쏟아져 들어온 백인들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선 이미 원주민들이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백인들은 원주민을 자신과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플랑드르 화가 얀 반데르스트라트(1523~1605)의 그림을 독일의 테오도르 갈레(1571~1633)가 판화로 제작한 작품 <아메리카>에는 그러한 편견이 잘 드러나 있다. <아메리카>는 이탈리아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1451~1512)가 1497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장면을 담고 있다. 그림 왼쪽에 보이는 대형 범선을 타고 온 그는 의복을 잘 갖춰 입고 십자가와 천체관측기를 든 채 막 상륙한 참이다. 그 앞 해먹에는 발가벗은 채 잠들어 있던 여성이 베스푸치의 기척에 놀라 일어나고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작품 하단을 보면 라틴어로 “아메리쿠스(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그가 그녀를 한번 부르니, 이후로는 항상 깨어 있더라”라고 적혀 있다. 즉 야만의 상태로 잠들어 있던 여자는 아메리카이며, 그녀는 정복자 남성으로 형상화된 유럽 백인들에 의해 문명화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들 뒤편에 있는 원주민들의 식사 장면으로 확증된다. 원주민들은 불을 피우고 뭔가를 굽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다름 아닌 사람의 다리 부위이다. 원주민들은 미개하고 원시적인 타자인 것이다. 이제 유럽인들은 이 아메리카라는 여인이자 대륙을 미몽에서 구원할 남성 십자군이 될 터였다.

그들은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대한 나름의 근거를 마련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존 오설리번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다. 미국의 한 신문사 주필이었던 그는 1845년 “해마다 수백만씩 인구가 증가하는 우리(백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이 대륙을 우리가 모두 차지하는 것은 명백한 운명이다”라는 기사를 썼다. 요컨대 미국은 북미 전역을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지배하고 개발할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오설리번은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인류의 진보를 추구하는 민족이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의 전진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명백한 운명’이 미국 백인의 ‘선민사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백인 화가 존 가스트(1842~1896)가 1872년에 그린 <미국의 전진>에서 엿볼 수 있다. 왼쪽에는 태평양이, 오른쪽에는 대서양이 보이는 가운데 미국을 상징하는 컬럼비아 여신이 전신선과 철도를 이끌고 로키산맥을 넘어 행진하고 있다. 여신의 뒤쪽으로는 역마차와 기차가 들어온다. 컬럼비아 여신은 서부로 금과 영토를 찾아 이동하는 백인들의 길을 터주고 이들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를 통해 미국의 팽창과 전진이 신의 계시이자 역사적 사명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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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가스트, <미국의 전진>, 1872년, 캔버스에 유채, 오트리 미국 서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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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이 가는 길에 걸림돌이 있어서는 안 되는 법. 역시나 앞길에 있던 원주민과 버펄로(원주민 생존의 원천이자 ‘형제’로 불렸던 들소)는 혼비백산하며 밀려나고 있다. 이 그림이 보여주듯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영토 약탈을 합리화한 주장인 ‘명백한 운명’의 대표적인 희생자였다. 그들은 학살당하거나, 백인들에게 속아 불평등 계약을 맺고 대대로 살던 터전에서 쫓겨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갈레의 <아메리카>가 설파하듯이 원주민의 ‘야만’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이는 백인문화에 동화되어 알파벳을 모델로 문자까지 만들어 사용한 유일한 원주민인 체로키족조차 여지없이 내쫓겼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한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

결국은 땅이었다. 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못 견디게 탐났기에 백인들은 그토록 모질게 원주민들을 핍박했던 것이다. 주저할 필요조차 없었다. ‘명백한 운명’이 모든 것을 합리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원주민들은 원래 원주민들이 거주하던 토지의 5%에도 못 미치는 조그마한 ‘인디언 보호구역’에 고립되었다. ‘보호’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이제 원주민들은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다. 유럽인이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만났던 15세기 당시 미국 내 원주민 인구는 500만명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25만명으로 95% 급감했다. 한때는 그들의 땅이었던 미국에서 이제 원주민은 전체 인구의 1%도 되지 않는 극소수 집단으로 전락했다.

그래서일까,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서 원주민은 더이상 괴성을 지르며 백인을 공격하는 악인이나 머리 가죽을 벗기는 원시인으로 재현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대평원에서 생태주의적 삶을 영위하는 초월자나 현자로 그려진다. 백인에게 영적인 각성을 주는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신화적·낭만적 재현은 이제 원주민들이 백인에게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침묵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면 이런 낭만적인 시각은 곧바로 거둬진다. 2016~2017년 ‘석유 파이프라인 건설 반대운동’ 진압이 대표적이다. 당시 미국 정부는 원주민들이 살아가는 노스다코타주의 스탠딩록 보호구역에 거대한 송유관을 건설하는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최초 설계에서는 이 송유관이 노스다코타주의 행정수도인 비즈마크시를 지나도록 계획되어 있었지만, 그 도시의 주민은 90%가 백인이었고 결국 송유관 경로는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변경된 것이다. 당연히 원주민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송유관이 샐 경우 원주민의 수원지이자 성지인 오와히 호수가 오염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유관이 새든 말든 트럼프 행정부는 원주민들의 저항을 철저하게 무력화했고 결국 2017년 송유관을 완공했다.

1860~70년대에 대평원 지역 원주민과 버펄로 학살을 주도했던 필 셰리든 장군은 이런 말을 했다. “선한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 죽어야 사는 존재, ‘인디언 잔혹사’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이유리 작가 |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그림을 매개로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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