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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선언' 집착에 좌초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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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관심 없는 종전선언 시간 허비하고
美中 등 국제정세는 외면, 대북에 매진
"불리한 환경" 탓하지만 靑·정부 책임도
"당분간 실질협력, 美中 외교 집중해야"
한국일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제8기 제6차 정치국 회의에 참석해 대미 대응 방안 등을 토의하고 있다.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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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대표 안보브랜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좌초 위기를 맞았다. 북한이 20일 핵실험ㆍ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모라토리엄(유예) 번복 의사를 내비치면서 사실상 대화 재개의 불씨가 꺼졌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정부 안에서는 “불리한 국제정세 탓에 어쩔 수가 없었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틀린 말은 아니다. 미중 갈등의 파고가 워낙 거세 북한 문제는 종속 변수가 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외교가 안팎에선 “청와대와 정부 책임도 크다”고 지적한다. 정부의 어떤 오판이 한반도에서 평화를 사라지게 한 걸까.

본질 벗어난 종전선언에 매몰


먼저 현 정부의 과도한 ‘종전선언’ 집착과 조급증이 정세 악화의 첫손에 꼽힌다. 문 대통령은 임기 말 답보 상태인 남북관계의 숨통을 트일 히든 카드로 종전선언을 꺼냈지만, 가능성은 물론 효용성도 낮은 정책에 매달려 시간만 허비한 셈이 됐다. 2018년 4ㆍ27 판문점선언에 담겼던 종전선언은 이듬해 ‘하노이 노딜’ 이후 남북ㆍ북미관계 경색 장기화로 무산됐다. 그러다 지난해 9월 문 대통령이 유엔 기조연설을 통해 다시 거론하고, 북한이 반응을 보이면서 깜짝 주목을 받았다. 정부는 종전선언이 북한 비핵화 협상의 ‘입구’가 될 것이라는 논리를 폈지만, 당시에도 성사 가능성을 낮게 점치는 관측이 대부분이었다.

정부의 낙관을 무너뜨린 가장 큰 근거는 종전선언이 더 이상 당사자 북한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핵화’와 ‘적대시 정책 철회’의 선후관계를 두고 북미의 평행선이 길어지자 “일단 대화부터 시작하자”는 게 종전선언 입구론의 골자다. 하지만 각종 제재와 감염병 확산으로 경제 붕괴 위기에 처한 북한 입장에선 실익 없는 고담준론에 불과했다. 정부 당국자는 21일 “남측이 무언가를 제안하는 자체가 북한에 태도 변화의 명분이 된다”며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가 종전선언이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명분의 빈칸도 채우지 못했다. 제재 완화와 관련한 미국의 작더라도 구체적인 계획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원칙만 되뇌고 있는데, 정부는 “조만간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최종건 외교부 1차관)” “종전선언을 한다면 베이징 동계올림픽 전에 하는 게 좋다(통일부 고위 당국자)” 등 장밋빛 기대를 쏟아냈다. 어떻게든 문 대통령 임기 내에 타결시키겠다는 목표에만 매달리다 보니 미 정가에서조차 ‘국내 정치용 아니냐’는 의심을 키웠다.

꽉 막힌 국제정세도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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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 사진)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워싱턴=AFP 연합뉴스·베이징=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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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와 정부는 갈수록 악화하는 국제정세도 애써 외면했다. 종전선언은 남북 만의 이슈가 아니다. 미국과 중국도 얽힌 ‘고차방정식’이다. 그러나 현재 북중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북한이 중국을 ‘뒷배’ 삼은 동시에, 중국 역시 북한을 대미 저항의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흐름이 뚜렷하다. 20일(현지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중국과 러시아 저지로 무산된 대북 제재 추가 시도가 단적인 예다. 미국이 안보리 제재 대상에 올리려 했던 북한인 5명은 핵ㆍ미사일 개발에 직접 관여한 실무자들이라 대북 결의 조건에 딱 들어맞는데도, 중국은 거부했다. ‘비핵화’란 대의명분보다 미국과의 ‘패권경쟁’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북한을 적극 두둔하는 중국을 설득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달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종전선언 지지를 요청한 적은 있지만, 얻어낸 건 없었다.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한일관계마저 개점휴업 상태를 지속하면서 대화 국면 전환을 위한 외교적 카드가 없다시피 하다”고 비판했다. 외교 반경을 두루 넓히는 전략에 실패한 탓에 남북대화에 그렇게 공들이고도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도발을 통해 한국은 ‘패싱’당한 모양새만 됐다.

'수사'보다 '실질협력'에서 돌파구 찾아야


더 큰 문제는 북한이 수십 년 반복해온 도발 패턴을 다시 선보인 만큼 대안도 마땅치 않다는 사실이다. 다만 핵 카드를 입에 올린 북한을 마냥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문가들은 문제의 원인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종전선언 같은 정치적 레토릭(수사)보다 실질 분야 협력에 집중해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유인할 반대급부를 축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종호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미 협의와 더불어 중국에 북한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현실적 방안”이라며 “쉽지 않겠지만 문 대통령과 대선후보들이 초당적으로 대북정책의 중지를 모으는 것도 협의 공간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준기 기자 j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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