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어머니’ 그린 뒤 쓰러진 거장… 죽어서야 고국 품에 안겼다 [아무튼, 주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러시아서 성공한 韓人화가… ‘초상화 대가’ 변월룡

조선일보

변월룡, ‘빨간 저고리를 입은 소녀’, 1954. /국립현대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남편이 자꾸 타슈켄트에 간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말이다. 1991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이 나라는 지하자원이 풍부해 이명박 정권 때 ‘자원외교’의 중요 상대국이었다. 이후 가스선이 설치되고, 텅스텐도 개발되더니 현 정부에서는 FTA 체결을 앞두고 있다. 협상 당시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한국 기업 진출을 받아들이는 대신 타슈켄트에 어린이병원을 지어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건물을 짓고 설비도 갖추어 주었으나, 문제는 전문 인력의 부족이었다. 결국 서울대 어린이병원 의료진과 기술자들이 한 번씩 가서 교육도 하고, 급한 수술도 하고, 기계도 싹 고치고 온단다. 남편도 그런 인력으로 달려 가서, 아침에 타슈켄트에서 아이의 머리를 열어 주먹만 한 뇌종양을 떼고 비행기를 타면, 인천공항에 다음 날 새벽에 도착한다.

타슈켄트! 지금은 이래저래 한국과 가까운 도시가 되었지만, 사실 이곳은 20세기 고려인 역사의 가장 아픈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이름이다. 1937년 스탈린의 악명 높은 소수민족 이주정책으로, 연해주에 모여 살던 고려인 17만여 명이 강제로 타슈켄트와 인근 지역으로 옮겨져 1953년까지 이동의 자유를 제한받았기 때문이다. 잠시 지도를 펼쳐보면, 연해주에서 타슈켄트가 얼마나 먼 거리인지 알 수 있다. 1937년 당시에는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가축 운반용 열차를 타고 타슈켄트까지 가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일이었다. 강제이주 과정과 그 직후에만 1만~2만명이 기아와 추위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소수민족 설움의 순간을 운 좋게 피해 러시아에서 당당히 성공한 연해주 출신의 한인 화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변월룡(邊月龍·1916~1990). 러시아 발음으로는 펜 바를렌이다. ‘달이 비치는 밤에 하늘을 나는 용’을 태몽으로 꾸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변월룡, ‘근원 김용준 초상’, 1953. /국립현대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연해주 출신의 성공한 한인 화가

변월룡은 1916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50㎞ 떨어진 시코톱스키 군(郡)의 한 유랑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태어났을 때 이미 행방불명되었고, 할아버지는 ‘호랑이 사냥꾼’이었다. 정말 용맹스러운 직업을 가졌던 할아버지는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유랑 생활을 하지만, 손자는 반드시 고국으로 돌아가 정착하기를 바랐다. 그런 할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며, 변월룡은 어릴 때부터 미술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변월룡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한인학교를 졸업하자, 그의 재능을 아낀 동네 한인들이 돈을 모아 그를 스베르들롭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로 유학 보냈다. 예로부터 한인들은 어딜 가나 교육열을 불태웠고, 똑똑한 아이가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힘을 모아 그를 키워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이 변월룡을 타슈켄트로의 강제이주에서 제외되도록 만들었다. 변월룡은 1937년 강제이주가 시작되기 딱 한 달 전에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이 위기의 순간을 모면했다. 물론 그의 다른 가족은 모두 타슈켄트로 강제이주당했고, 변월룡 가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매형은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이주 전 처형되었다. 당시 체포, 처형된 2000여 명의 고려인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조선일보

변월룡이 북한에 있을 때 찍은 사진. /변월룡미술연구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역경 속에서 살아남은 이는 주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법이다. 변월룡은 스베르들롭스크 미술전문학교를 최고 성적으로 졸업한 후, 다시 서북쪽으로 한참 가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레핀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러시아에서 제일 좋은 국립미술학교였다. 2차 대전 중 유명한 ‘레닌그라드 봉쇄’ 때는 도시를 탈출, 우즈베키스탄의 고도(古都) 사마르칸트에서 공부했고, 타슈켄트로 이주당한 가족과 재회하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레핀 미술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51년 미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3년에는 이 학교의 부교수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 후에 그는 정교수 신분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는 소수민족 출신으로는 매우 이례적인 기록이었다.

◇북한에서 만난 화가들

연해주 시코톱스키에서 시작해 블라디보스토크, 스베르들롭스크, 레닌그라드, 사마르칸트, 타슈켄트, 그리고 다시 레닌그라드로 이어진 그의 멀고 먼 생(生)의 여정이 1953년 6월에는 평양으로 향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나 보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 북한은 400여 명의 각계각층 소련인 전문가를 국가 건설의 ‘고문’으로 받아들이는데, 변월룡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미술 분야 전문가로 러시아 정부에 의해 공식 파견되어, 평양미술대학의 기초를 다지는 일에 투입되었다. 아직은 전쟁 상황이라, 이름은 ‘평양’미술대학이지만, 이 학교는 평양에 있지 않고, 신의주 인근 피현군 송정리에 소개(疏開)되어 있었다. 학교 시설이라고는 허물어져 가는 기와집 한 채가 전부였다.

조선일보

피현군 송정리에 있던 평양미술대학의 풍경을 담은 변월룡의 에칭(1953). 기와집 한 채가 시설의 전부인데, 그 앞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소나무가 서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변월룡은 김용준, 배운성, 문학수, 정종여 등 북으로 간 최고의 예술가 그룹을 만났다. ‘근원수필’의 저자 김용준, 베를린에서 유학한 배운성의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여기 그 반가운 이름들이 모두 모여 변월룡과 함께 초라한 기와집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나중에 변월룡이 러시아로 돌아간 후에도 이들은 한동안 편지를 교환했다. 그중에서 배운성이 판화를 제작하려는데 조각도가 없으니, ‘요렇게 생긴 조각도를 구해 보내 달라’고 그림을 그려 부탁한 내용의 편지가 특히 짠하다.

조선일보

평양미술대학 앞에서 변월룡과 교수진. 1953년. /변월룡미술연구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배운성이 변월룡에게 보낸 편지. 조각도를 보내 달라는 내용이다. 1955년 5월 30일. /국립현대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원래 초상화의 대가였던 변월룡은 북한에서 만난 화가, 소설가, 무용가 등 수많은 예술가의 초상을 남겼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용가 최승희의 초상이나, 수필가이자 화가, 감식가였던 근원 김용준의 초상은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그는 초상화의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사진이 아닌 실재하는 모델을 직접 보며 그렸다. 그래서 살아있는 인물의 내면 세계를 꿰뚫어, 그의 품성과 인격이 그림을 통해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닥터 지바고’의 저자인 러시아 문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고, 20개 언어를 구사했다는 전설적인 러시아 스파이 비스트롤레토프의 비극적인 말년 모습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마주친 주변의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모습도 많이 그렸다. 변월룡이 그린 초상화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그는 평생 수없이 다양한 인물을 만났고,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했음에 틀림없다.

조선일보

변월룡, 소설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초상’ (1949). /개인소장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변월룡, 무용가 최승희 초상. 1954. /국립현대미술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변월룡의 쓸쓸한 풍경화

그런데도 그의 작품, 특히 풍경화는 왜 이렇게 허전하고 슬픈지 모르겠다. 그가 말년에 그린 불정사 ‘다라니 석당’을 보자. 분명 봄꽃이 피어난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폐사지(廢寺址)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석당(石幢)은 왠지 허전한 느낌을 주고, 화면 전체는 마치 눈앞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고 아련하고 먹먹하다. 마치 ‘그리움’이라는 한 겹의 렌즈 너머로, 저 먼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조선일보

변월룡, ‘그곳의 기념비, 다라니 석당’(1984). 1954년 북한에 머물 때 본 불정사의 다라니 석당을 추억하여 그린 작품이다. /개인소장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실 변월룡은 1953년부터 1954년까지 고작 1년 3개월을 북한에서 보냈을 뿐이다. 이후 그가 그린 무수히 많은 북한 풍경화들은 그때의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그린 것이다. 변월룡은 1954년 9월 이질에 걸려 건강상 이유로 러시아로 돌아갔고, 이후 다시 북한으로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북한 정부는 연안파 제거 후 1950년대 후반 친소파의 숙청을 본격화했는데, 그 과정에서 변월룡도 숙청되었다. 한때 평양미술대학 고문으로 추앙받던 변월룡은 1950년대 말 이후 북한 미술사에서 완전히 삭제되었다.

그는 1985년까지 레핀 미술아카데미 교수로 지내면서,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깊은 내면은 늘 바람 부는 언덕에 홀로 서 있는 소나무와 같았던 것일까. 그는 북한으로 다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그때부터 거의 매년 북한 대신 연해주를 방문했다. 레닌그라드에서 연해주도 진짜 멀다. 가족은 이미 타슈켄트로 가고 아무도 없는 곳이 되었지만, 연해주는 변월룡의 고향이자,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형을 간직한 곳이니까. 나홋카에서, 칼리니노에서, 유즈노 사할린스크에서, 그는 바람 부는 쓸쓸한 풍경을 수도 없이 유화로, 에칭으로 남겼다.

조선일보

변월룡, ‘칼리니노’, 1969. /개인소장


◇어머니, 그리움의 정점

1985년 변월룡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 그는 이미 1945년에 타슈켄트에서 생(生)을 마감한 ‘어머니’의 모습을 뒤늦게 유화로 그렸다. 까만 치마와 하얀 무명 저고리를 입고,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서서, 우리를 지켜보는 어머니! 아무것도 없는 검은 배경 위로 마치 ‘떠오르는 것처럼’ 그려진 어머니 옆에는, 옹기 하나가 간신히 눈에 띄게 놓여 있다. 흙으로 빚어 스스로 숨을 쉬는 한국인의 특허품인 옹기는 된장⋅고추장 같은 온갖 발효 음식을 생산해 내는 어머니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연해주에서도 타슈켄트에서도 이 항아리만은 목숨처럼 그의 어머니와 함께했으리라.

조선일보

변월룡, ‘어머니’, 1985. /개인소장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변월룡은 ‘어머니’를 그린 후 5년 지난 1990년, 그녀의 곁으로 떠났다. 그의 사후(死後) 그나마 그를 받아들인 고국은 북한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한러 수교 후 변월룡의 작품은 미술사학자 문영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한국에 들어왔고, 2016년 변월룡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다. 러시아에 있는 유족의 배려로 변월룡의 많은 작품과 자료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으로 기나긴 여정 후의 ‘안착’이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