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금주령 어기면 사형까지, 영조가 자초한 혼란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2 <꽃피면 달 생각하고>

대중과 국가권력의 관계는 피지배·지배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코로나19 하에서 특히 현저해졌듯이 알력과 대립의 관계이기도 하다. 과거 역사에서 그런 양상을 촉발시키던 이슈 중 하나가 금주령이었다. KBS <꽃피면 달 생각하고>의 배경인 조선시대 금주령도 대중과 왕조권력의 마찰을 초래하곤 했다.

금주령의 원래 취지는 식량 절감에 있었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그것과 더불어 '교화'의 목적도 짙어졌다. 백성들을 다잡고 사회기강을 세우고자 술을 못 마시게 하는 일이 잦아졌다.

2017년에 <역사민속학> 제53호에 실린 역사학자 박진의 논문 '조선시대 금주령과 감선(減膳, 반찬 줄이기)의 정치적 활용'은 "음주 상황에서 나타나는 각종 비례(非禮)에 대한 교화가 금주령의 또 한 가지 원인으로 추가되면서 금주령의 바탕이 되는 이념은 온전히 국가 운영을 위한 가치를 반영하게 되었으며, 왕과 관료들은 금주령을 통해서 국가의 기본이념이 전파되고 현실화될 수 있음을 기대했다"고 설명한다.

곡식이 부족해 술을 빚으면 안 되는 경우에만 금주령을 내린 게 아니라, 백성들의 음주 습관으로 예법 이탈이 많아지는 경우에도 금주령을 내렸던 것이다. "물자 절약에서 교화 쪽으로 점차 비중을 옮겨가게 되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꽃피면 달 생각하고>는 홈페이지 프로그램 소개란에서 '가상의 조선'을 다루고 있다고 표방했다. "18세기 가상의 조선, 금지된 것에 의문을 가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던 시대"라며 "엄혹한 금주령의 시대"가 드라마 배경이라고 밝혔다.

금주령으로 가장 유명했던 군주
오마이뉴스

▲ KBS <꽃피면 달 생각하고> ⓒ K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재위 기간이 단 1년이라도 18세기에 걸치는 군주는 숙종(재위 1674~1720), 경종(1720~1724), 영조(1724~1776), 정조(1776~1800), 순조(1800~1834) 다섯이다. 조선시대에 금주령으로 가장 유명했던 군주가 이 안에 있다. 제21대 주상인 영조가 바로 그다.

위 논문은 "(음력으로) 영조 32년 정월부터 조선시대에서 가장 길고 강력한 금주령이 시행되었다"고 한 뒤 "10여 년이 지나서 해제된 금주령은 유례없이 엄격"했다고 평가한다. 양력으로 1756년부터 조선 최강의 금주령이 시행됐던 것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엮은 <조선 국왕의 일생>은 "영조는 술을 광약(광약)이라고 보아 절대 마시지 못하게 하는 등 매우 엄격하게 대처했다"고 한 뒤 "술 역시 미리 미리 조심하지 않으면 마음을 방탕하게 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당시의 엄격한 분위기는 음력으로 영조 39년 11월 22일자(양력 1763년 12월 26일자) <영조실록>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 날짜 실록은 논평 부분에서 "이때 임금이 준엄한 법률로 술을 금했기 때문에 위반자들이 종종 사형을 당했다"며 한 집이 위반하면 세 집이 함께 처벌을 받는 연좌제가 적용됐다고 설명한다. 자기 가족이 술 마시는지 감시해야 할 뿐 아니라, 옆집 이웃의 얼굴이 붉은지 여부도 수시로 체크해야 했던 것이다.
오마이뉴스

▲ KBS <꽃피면 달 생각하고>. ⓒ K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 KBS <꽃피면 달 생각하고> ⓒ KBS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 속의 임금은 금주령 기간에 과거급제자들에게 축하주를 준 뒤, 술을 마신 사람들의 급제를 취소했다. 주인공 남영(유승호 분)만 입에 대지 않아 4등에서 장원으로 등수가 조정됐다. 1~3등에 포진한 권력층 자제들을 떨어트릴 목적으로 임금이 일부러 그런 수를 썼던 것이다.

물론 금주령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됐다. 드라마 속의 임금이 보여준 위 장면은 그런 점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 하겠다. 현실 역사에서도 영조만이 과도하게 금주령을 시행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자기 아들이기는 하지만 기대에 못 미쳐 늘 불만스러웠다.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해서도 금주령을 엄격히 시행했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세수도 하지 않고 옷차림도 단정하지 않아 초췌하게 보일 때는 영조가 다짜고짜 너 술 먹었냐며 다그치는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럴 경우에 사도세자는 실제로는 마시지 않았더라도 추궁을 견디다 못해 허위 자백을 하곤 했다고 한다. 한번은 사도세자가 마셨다고 실토하자 영조에게서 '누가 술을 갖다 주더냐?"라는 질문이 나왔고, 사도세자에게서 "희정이가 주더이다"라는 대답이 나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궁녀 이름을 아무렇게나 댔던 것이다.

이렇게 영조 정권은 사회기강을 바로잡겠다는 일념 하에 엄격한 금주령을 시행했고, 영조는 자기 아들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법을 집행했다. 이 정도였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느끼는 자유의 억압은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 날짜 <영조실록>은 논평 대목에서 "백성들이 매우 두려워했는데도 여러 신하들이 감히 간언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실록 사관들을 비롯해 조정 신하들이 볼 때도 백성들을 과도하게 옥죄는 법령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나치게 과도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있었다. 다름 아닌 영조 자신이었다. 아들을 비롯해 자기 이외의 사람들에게 금주를 철저히 강요한 영조였지만, 그 역시 정 견디기 힘든 경우에는 술을 찾곤 했다.

위 박진 논문은 "엄격한 금주령 하에서도 왕은 스스로 약이라는 명목으로 실상은 술인 송절차를 섭취"했다고 소개한다. 소나무를 재료로 만든 송절주를 마시면서 '이건 약이다'라며 스스로 합리화했던 것이다.

영조는 감정을 절제할 수 없을 때도 술을 마셨다. 김백철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의 <박문수, 18세기 탕평관료의 이상과 현실>은 반역 사건이 났을 때 영조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스로 금주령을 어기고 만취"한 일이 있다고 설명한다. 금지하기 쉽지 않은 것을 남들에게만 금지시키고 그 자신은 제대로 금하지 못했던 것이다.

실패로 돌아간 금주령

이랬기 때문에 가장 강력했다는 영조시대의 금주령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사회기강이 바로잡히기는커녕 정반대 결과가 나타났다. 과도한 음주로 인한 사회적 폐해가 이전보다 심각해졌다는 평가까지 있었을 정도다.

위 박진 논문은 "백성들이 오히려 강압적 분위기에 대한 반발로 몰래 술을 빚어 마시는 세태가 지속되자, 결국 금주령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로 마무리"됐다고 평가한다. 백성들이 금주령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도 법령 위반이 속출했던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강력한 금주령이었지만 실상은 별반 효과가 없었다는 점은 금주령 종료 3년 뒤에 빚어진 상황에서도 표출된다. 영조 46년 1월 26일자(1770년 2월 21일자) <영조실록>에 따르면, 만 76세인 영조는 이날 주강(晝講, 정오 경연)에 나갔다가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 신하와 임금이 함께하는 점심 세미나 자리에서 비서관인 승지가 술 냄새를 풍겼던 것이다.

밤중도 아닌 한낮이었다. 임금의 지근거리에 있는 승지가 이런 시각에 술을 마신 채 임금과의 세미나 자리에 나타났다. 사회기강을 바로잡겠다며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했지만, 효과가 별반 없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대중을 강하게 옥죄는 방법으로는 사회질서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음을 반영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종성 기자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마이뉴스에서는 누구나 기자 [시민기자 가입하기]
▶세상을 바꾸는 힘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오마이뉴스 공식 SNS [페이스북] [트위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