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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강소국 스위스의 비결…시계 못지 않게 초콜릿·치즈도 한몫했네 [다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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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한의 ‘연구실 가는 길’

[경향신문]

경향신문

알프스를 걷다 보면 평화롭게 풀 뜯는 소들을 만나게 된다. 생태적인 동물 복지를 누리며 자란 소에서 만들어지는 신선하고 맛있는 스위스의 우유로부터 수백 종류의 치즈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생아의 목숨을 구한 분유와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밀크초콜릿도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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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9년 5월, 현재 재직 중인 연구실을 방문하여 세미나와 인터뷰를 마치고 프렌치 레스토랑에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음식을 기다리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누군가가 나에게 질문을 했다.

“초콜릿 좋아해?”

“음. 좋아하긴 하는데 일부러 찾아서 사 먹는 정도는 아니야.”

“치즈는?”

“치즈는 잘 몰라서 즐긴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네.”

“하하. 스위스의 대표적 특산물인 초콜릿과 치즈에 별 흥미가 없구나!”

말하고 보니 그랬다. 갑자기 당이 떨어질 때가 아니면 단것을 찾지 않는 나로서는 평소에 초콜릿을 먹을 일이 많지 않았다. 치즈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와인을 먹을 때 안주로 브리, 카망베르, 하우다(고다) 치즈처럼 대중적인 치즈를 곁들여 먹는 편이었지, 스위스의 다양한 치즈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고 접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스위스 생활 3년차에 접어든 지금, 나는 일상적으로 초콜릿과 치즈를 즐기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 변화는 비가역적인 변화가 될 것 같다.

평소엔 찾지 않았던 초콜릿·치즈
오랜 ‘손맛’과 혁신·진화 목격
커피 취향까지 바꾼 신세계 경험
이주 3년차 들어 애호가로 변모

작은 나라에서 선택적 기술로 도전
‘쓴맛’ ‘보존의 어려움’ 각각 극복
전 세계 최상 품질로 고부가 창출
‘최고’ 정신이 부유한 나라로 우뚝

#2. 스위스는 초콜릿의 나라다. 전 세계 어느 공항 면세점을 가든 스위스 초콜릿을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고급 초콜릿을 만들어내는 나라일 뿐 아니라 솔선수범하여 초콜릿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스위스 초콜릿 제조협회인 초코스위스는 지난해 스위스인들의 연간 초콜릿 소비량이 평균 9.9㎏으로 1982년 이후 처음 10㎏ 미만으로 줄어들었다는 충격적인(?) 통계를 발표했다. 초콜릿 소비량이 연간 607g(2015년 통계)인 한국인과 비교하면 스위스인들의 압도적인 초콜릿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초콜릿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아마 스위스 혹은 벨기에일 것이다. 스위스가 초콜릿의 나라가 된 것은 이곳에서 오늘날의 초콜릿을 있게 한 혁신과 진화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스위스와 함께 초콜릿 세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벨기에의 초콜릿 역사도 스위스와 깊숙이 얽혀 있다. 초콜릿 셸 속에 각종 필링이 들어 있는 ‘프랄린’을 발명하며 오늘날 벨기에 고급 초콜릿의 뿌리가 된 ‘노이하우스’가 스위스 출신 이민자인 장 노이하우스에 의해 창립됐다.)

우선 지난 100년 이상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온 부드럽고 달콤한 밀크초콜릿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보(Vaud) 칸톤에서 탄생했다. 레만 호수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도시 브베에서 활동하던 다니엘 피터는 1875년 우유와 초콜릿을 결합하여 밀크초콜릿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쌉싸름한 맛의 초콜릿을 우유와 섞어 부드러운 맛을 내려는 아이디어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우유의 수분 때문에 곰팡이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다니엘 피터는 당시 마찬가지로 브베에서 활동하던 앙리 네슬레의 도움으로 우유의 수분을 제거하는 문제를 해결한다. 세계 1위의 식품회사인 바로 그 ‘네슬레’의 창업자 말이다. 세계 최초로 가루형 분유를 개발하여 수많은 신생아의 생명을 구한 앙리 네슬레의 기술과 초콜릿 장인 다니엘 피터의 집념이 만나 탄생한 제품 ‘갈라(Gala, 우유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그리스어)’는 전 세계에 밀크초콜릿의 시대를 열게 된다.

다니엘 피터 이후에도 스위스는 초콜릿 진화의 무대가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 브랜드 ‘린트’의 창시자인 로돌프 린트는 콘칭이라는 기법을 발명하여 더욱더 부드러운 초콜릿 맛의 세계를 열었다. 그라인더 역할을 하는 롤러가 달린 콘체 속에서 며칠 동안 곱게 갈리고 휘저어진 초콜릿은 콘칭 이전의 거친 식감과는 비교할 수 없이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맛을 낸다.

한편 내가 스위스에서 살면서 이렇게 깊은 역사와 전통을 지닌 스위스 초콜릿에 빠지게 된 것은 단순히 구하기 쉽거나 맛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커피’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커피 주세요”라고 주문하면 나오는 ‘기본’ 커피는 ‘카페 크렘(Cafe Creme)’이다. 스위스의 국민 커피라 할 수 있는 카페 크렘은 크림이 들어간 커피가 아니라 길게 뽑아서 마시는, 크레마가 풍성한 에스프레소이다. 일반적인 에스프레소보다는 묽지만,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서 먹는 아메리카노에 비해선 양이 훨씬 적고 맛은 더 진하다.

이 ‘카페’를 마시면 저절로 달콤하고 부드러운 밀크초콜릿이 생각난다. 카페가 흘러간 자리에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물면, 커피의 쓴맛이 녹아내린 자리에 에스프레소와 초콜릿의 풍미가 감미롭게 몸을 섞는다. 그래서인지 식당이나 카페, 빵집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미니 초콜릿을 함께 주는 경우가 흔하다. 스위스에 오기 전까지 에스프레소는 너무나 쓴 독약 같았는데, 이곳에서 에스프레소와 밀크초콜릿의 ‘컬래버’라는 신세계를 경험하면서 커피에 대한 취향 또한 바뀌게 되었다.

#3. 날씨가 좋은 계절에 알프스로 하이킹을 떠나면 기차 차창 밖으로, 하이킹 트레일 위에서 펼쳐지는 ‘스위스스러운’ 풍경이 있다. 넓고 푸른 목초지와 그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의 모습이다. 전통 소 방울을 목에 건 소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울려 퍼지는 맑고 청아한 ‘워낭소리’를 듣고 있으면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스위스에서 낙농업은 경관 보존의 목적 또한 지니며, 이를 근거로 정부의 지원도 이루어진다.)

스위스는 낙농업이 발달한 나라이다. 알프스가 국토를 가로지르고 있는 스위스는 농경지의 4분의 3이 초원과 방목지에 해당할 정도이다. 친환경적이고 엄격한 생산관리를 통해 최상 품질의 우유를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알프스의 풀밭에서 자란 소들이 만들어낸 우유는 정말 맛있고 신선하다. 이런 나라에서 최초의 분유와 밀크초콜릿이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갓 짜낸 우유의 신선함은 오래가지 못한다. 냉장 시설이나 살균 기술이 발달한 지금이야 보존 가능 기간이 더 길어졌지만 예전에는 보관과 운반, 유통이 더욱더 힘들었다. 즉 소비하거나 판매하지 못한 채 상한 우유를 버려야 하는 일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치즈는 바로 이러한 우유의 본질적인 문제와 한계를 극복하는 혁신적인 발명이다.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치즈는 우유처럼 쉽게 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래 숙성될수록 더 가치가 높아지기까지 한다. 보관과 운반이 우유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월하고 상품성도 훨씬 높다. 치즈라는 혁신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장점들 때문에 스위스에선 오래전부터 치즈 생산이 발달해왔고, 현재에도 우유 생산량의 절반가량이 치즈 생산에 투입되어 수백 종류의 치즈가 만들어지고 있다.

스위스에 오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치즈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스위스 치즈 하면 구멍이 숭숭 뚫린 ‘에멘탈’ 치즈를 떠올리는데, 동네 마트에 가보면 에멘탈 치즈뿐만 아니라 스위스 각지에서 생산된 수십 종류가 진열되어 있다. 생산지뿐만 아니라 원료, 생산 방식, 숙성 기간 등에 따라 맛과 모양이 다르다. 여름철 알프스 고원에서 수백 종류의 풀과 허브를 먹은 소의 젖으로부터 만들어진 ‘알프스 치즈’ 같은 특별한 치즈도 있다.

이런저런 치즈들을 자연스럽게 접한 후 일상적으로 즐기게 된 나의 ‘최애’ 치즈는 내가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아름다운 고성이 있는 그뤼에르(Gruyere)에서 생산되는 ‘그뤼에르 치즈’이다. (6개월부터 1년 이상 숙성된 것 중 8개월 숙성을 가장 좋아한다.) 그뤼에르 치즈는 스위스를 대표하는 음식인 치즈 퐁뒤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기도 한다. 치즈가 하도 맛있어서 직접 그뤼에르에 있는 치즈 공장을 방문하여 생산 과정을 지켜보았는데, 여전히 많은 과정이 오랜 세대를 거쳐 전수되어온 인간의 ‘손맛’으로 조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상 품질의 치즈를 생산해내는 스위스인들은 한국인들보다 열 배가 훨씬 넘는 치즈를 소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선 치즈를 그냥도 먹고, 빵에 끼워서도 먹고, 퐁뒤로 녹여서도 먹는다. 겨울철인 요즘 우리 가족이 가장 즐겨 먹는 치즈는 ‘라클레트(Raclette)’ 치즈이다. 큰 치즈 덩어리를 반으로 자른 후 단면을 불에 쬐어 녹아 흘러내리게 하고, 이를 감자와 빵에 곁들여 먹는 스위스 전통 음식인 라클레트는 요리 방식인 동시에 요리에 사용되는 치즈를 지칭한다. 요즘은 가정에서 이미 얇게 슬라이스 된 치즈를 작은 철판에 데워서 간편하게 먹는 방법이 보편화되어 있다. 퐁뒤보다 훨씬 조리가 간단하면서 맛도 뒤지지 않아 더 즐겨 먹게 되었다.

#4. 스위스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초콜릿과 치즈 애호가로 변모했다. 아마도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종종 에스프레소에 밀크초콜릿을 곁들이는 커피 타임을 갖고, 쌀쌀한 계절이 오면 치즈를 녹여 감자에 올려 먹는 취미를 유지하게 되지 않을까. 이곳에서 ‘다른 삶’을 경험하며 새로운 음식 문화를 익힌 만큼 인생에서 즐길 거리가 더 풍성해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스위스의 초콜릿과 치즈를 즐기게 되고, 즐기다 보니 더 잘 알게 되면서, 스위스의 특산물로부터 이 나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된 비결을 짐작해 보게 된다. 스위스의 밀크초콜릿과 치즈는 우유라는 원료를 사용한다는 공통점 외에도, 각각 ‘쓰고 거친 맛’과 ‘보존의 어려움’이라는 문제를 혁신적인 ‘기술’로 극복하고,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최상 품질을 달성하여 원료에는 없던 고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 이 공통점은 스위스의 또 다른 대표 상품인 ‘시계’뿐만 아니라 현재 스위스 경제의 한 축인 제약업에도 일맥상통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나라인 만큼 현실적으로 모든 기술을 개발할 수는 없지만, 무언갈 한다면 제대로, 최고로 해낸다는 스위스인들의 존경스러운 정신이 부드럽고 달콤한 밀크초콜릿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강소국 스위스를 만들지 않았을까.



경향신문

▶이대한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작은 벌레를 연구하며 청춘과 박사학위를 맞바꿨다. 연구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청년이었지만, 박사가 되었음에도 생명과 생물학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3년 동안의 연구를 마친 후, 대서양 건너 스위스 로잔대학에서 초파리를 해부하며 뇌의 진화를 연구하고 있다.


이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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