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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다음 생도 어머니의 아들로…”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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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33)



사는 동안 많은 사람과 만나고 또 이별하기도 한다. 어머니와는 배 속에 있을 때는 한 몸이지만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면서 헤어지기 연습을 하다 결혼하면 좀 더 멀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다가 결국에는 하늘나라로 보내 드림으로써 다시는 볼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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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49재를 지낸 암자에서 바라본 모습. [사진 조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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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명절이나 휴가철 또는 부모님 생신과 같은 행사가 아니면 어머니 뵐 기회가 없어 떨어져 지내는 기간이 몇 개월이 될 때도 있었다.

아들만 여덟을 키우셨는데, 오랜만에 만나도 인사만 하고 나면 더 할 말이 없어 친구들 만나러 간다며 나갔으니 오히려 더 허전하셨을 것이다. 아들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셨지만 살갑게 대하는 딸이 없다 보니 어떨 때는 한숨을 쉬면서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딸도 하나 못 낳았는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하셨다. 그 당시는 어머니의 그런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결혼 후 남매를 키우다 보니 아들만 키우신 그때의 심정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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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농원에서 모실 때 한가하게 골목길을 거니는 어머니와 장모님. . [사진 조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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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서울에 오셨다가 일찍 출근하는 아들을 보지 못하자 다음 날 아들을 보려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또 “아들이 수척해졌다”라며 며느리에게 “남편 보약을 지어주라”고 성화를 하셔서 어머니 덕분에 한약을 먹기도 했다.

퇴직 후 옛 추억을 소환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장모님까지 모시고 시골 농원에서 보름간 지낸 적이 있었다. 걸음걸이도 불편하고 귀가 어두워 생각했던 대화가 쉽지 않아 너무 늦게 모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아들이 어린애처럼 보이는지 사사건건 간섭이 심해 언성을 높이기도 했지만, 그때의 추억이 그립기만 하다. “자식은 효도하고 싶으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고전 구절이 떠오른다.

두 어머니를 모신 후 1년 만에 장모님이 먼저 하늘나라로 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셨다. 집에서 모시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수시로 뵈러 가다가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면회마저도 자유롭지 못했다. 바깥 사정을 잘 모르시는 어머니는 ‘자식들이 나를 요양원에 보내 놓고 찾아오지도 않는다’고 원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자주 찾아뵙고 휠체어도 밀어드리고 침대 옆에 앉아 다정스럽게 이야기라도 주고받았을 텐데 아쉬움만 가슴에 가득하다.

앙상하게 여위신 모습으로 휠체어에 앉아 한 달에 한 번밖에 안 되는 비닐 막으로 가로 쳐진 면회를 하면서도 “고맙다”, “건강해라” 하며 항상 자식 걱정이셨다. 살아 계실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느끼셨는지 집에 가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다.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그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해 자식으로서 도리를 못한 것 같아 죄송스러울 뿐이다. 어머니와 이별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과 질환으로 대학병원 외래 진료 후 근처 카페로 모시고 갔을 때 빵과 음료수를 맛있게 드시며 밝게 웃으시던 모습이 선히 그려진다.

요양병원에서 피를 토하셨다면서 큰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내려갔지만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신다. 귀 가까이 대고 “서울의 큰아들이 왔어요”라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자 눈을 뜨지도 않은 채 눈물만 몇 방울 흘리신다. 사람 몸에서 청력이 가장 늦게 없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자식의 목소리를 들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음을 울리며 일정한 파동을 그리던 심장 박동기의 그래프가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진다. 의사 선생님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신다.

요양병원에서 대학병원으로 옮긴 지 10시간도 안 되어 아무리 소리쳐 불러 보지만 미동도 없으시다. ‘어머니’라는 부름에 눈물로 응답하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신 것이다. 제대로 하직 인사도 드리지 못한 채 어머니를 보내 드려야 하다니 한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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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 차려진 어머니 빈소. [사진 조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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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을 마치고 화장을 한 후 유골함을 가슴에 안고 선산이 있는 고향 집에 들렸다. 열여섯에 시집와서 7대 종부로 20년 동안 사셨던 곳이다. 고향을 떠난 후에는 시제나 큰 행사가 있을 때나 들르시곤 하다가 이제 한 줌의 유골로 돌아오셨다. 마당을 한 바퀴 돌면서 어머니가 사셨던 집에 돌아왔다고 말씀을 드리는데 눈물이 앞을 가린다. 큰일을 앞두고 새벽에 일어나 정화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리던 3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어머니를 반긴다. 아마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면서 “뒷산에 계신 조상들은 내가 잘 지켜 주고 있으니 너도 편히 쉬도록 하라”고 했을 것 같다.

미리 조성된 종중묘지 아버지 옆에 고이 모셨다. 20년 먼저 가 계시던 아버지가 “여보! 혼자서 자식 보살피느라 정말 고생 많았소”라고 하자, “영감 그동안 잘 계셨지요. 저도 이제 자식 곁을 떠나 당신 옆으로 왔어요”라며 진한 포옹을 하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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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중묘지 아버지 옆에 어머니 유골을 안치하고 있는 필자. [사진 조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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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자락에 있는 암자에서 49재를 지냈다. 가족들이 모두 참석해 2시간에 걸친 제를 올리면서 어머니의 영혼이 다음 세상에서는 좋은 곳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간절하게 기도드렸다. 이제는 자식뿐 아니라 이 세상과도 이별하셨다.

이웃 사람들과 싫은 소리 한번 없이 베풀며 사셨으니 그토록 바라시던 극락으로 가셨을 것이다. 살아생전에도 형제들이 우애 있게 지내기를 바라셨는데 부모님과 형님이 안 계셔 이제 장남으로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어머니는 우리와 영원한 이별을 하고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함께 했던 소중한 기억을 꺼내 보며 다음 세상에서도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못다 한 효도를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사람의 일생은 이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소풍이라고도 한다. 어머니의 소풍이 얼마나 즐겁고 보람된 시간이었을까? 한평생 고생 많으셨지만, 아버지와 큰 소리 내며 싸우는 것 한번 보지 못할 정도로 금실이 좋아서 마음만은 행복했던 순간이 더 많았을 것 같아 조금은 위안이 된다.

불효자식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좋은 곳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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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경제협력위원회 행정위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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