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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오뚝이 같은 야구인생, 김건국은 ‘희망’을 던진다 [안준철의 휴먼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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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품을 팔면서 운동 하고 있습니다.”

20일 오후 전화가 연결된 김건국(34)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막 운동을 마친 뒤였다.

현재 소속팀이 없는 김건국은 운동할 장소가 일정하지 않다. “감사하게도 롯데 자이언츠에서 배려해주셔서 어제는 상동에 가서 (최)영환이, (김)진욱이랑 같이 훈련했습니다. 오늘은 센터에 가서 운동을 하고 왔습니다.”

매일경제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환하게 웃었던 김건국. 야인 신분이지만, 김건국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사진=롯데 자이언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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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달 전까지 김건국은 롯데 선수였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롯데는 김건국에게 보류선수 제외를 알렸다. 야구 인생에서 두 번째 방출, 다시 야인으로 돌아갔다.

처음이 아닌 방출이라 내성은 있었다. 그러나 첫 방출의 쓰라림과는 여러 면에서 또 상황이 다르긴 하다.

2006년 덕수정보산업고(현 덕수고)를 졸업하고 두산 베어스에 2차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6순위로 지명돼 계약금 1억 3000만 원을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김건국은 미래는 밝았다. 다만 프로의 벽은 높았다. 팔꿈치 부상도 당했다. 2007년 1군에서 1경기 1이닝 투구 후 2008시즌 후 방출됐다.

“그래도 그때는 더 젊었고, 저 혼자만 생각하면서 목표를 위해 쉼 없이 달려갔습니다. 지금은 가족이란 울타리가 생겼습니다. 아내와 두 아들이 제게 큰 힘이 되지만, 저만 생각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닙니다. 그때보다는 부담이나 걱정도 많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김건국의 야구인생은 오뚝이와도 같다. 이는 야구를 보는 사람들 사이에선 잘 알려져 있다. 현역으로 병역을 마치고,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야구에 대한 도전을 시작했다. 2012년말 지금은 없어진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의 트라이아웃에 합격하면서 김건국의 야구인생은 다시 시작됐다. 고교시절부터 주무기였던 빠른 공에 주목한 NC다이노스가 그를 선택했고,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다시 kt위즈로 옮겼다. 그때 김용성이란 이름을 김건국으로 바꿨다.

2017년에는 롯데로 트레이드됐다. 오태곤(SSG랜더스) 배제성, 장시환(한화 이글스)이 엮인 트레이드였다. 그리고 2018년 9월 6일, 4082일 만에 1군 마운드에 올랐다. 그해 10월 13일에는 선발등판 해 5이닝 1실점으로 데뷔 첫 승을 신고했다. 1군 데뷔 4119일 만에 건지 첫 승이었다. 김건국이란 이름은 ‘인간승리’의 상징이 됐다.

그렇게 롯데에서 마당쇠로 제 몫을 했다. 긍정적인 성격 때문에 따르는 후배도 많았다. 하지만 롯데는 그와 이별을 택했다.

롯데를 나온 지도 3개월 째다. 하지만 김건국은 10여 년 전 처음 방출됐을 때처럼 묵묵히 운동을 시작하며 새 보금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물론 여건은 좋지 않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프로야구 10개 구단들은 선수단 규모를 축소하고 있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김건국은 커트라인에 걸리기 좋은 조건이었다.

“아직 테스트도 받지 못했습니다.” 김건국은 웃었다. 씁쓸한 웃음소리였다. 김건국에게 테스트를 받으러 오라고 손을 내민 구단도 없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다.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가장 힘든데, 겨울이라 환경적인 제약이 큽니다. 그래서 발품을 팔면서 연습하고 있습니다.”

부산공고에서 몸을 만들던 김건국은 상동 등 실내연습장을 전전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을 다시 시작했어요. 열심히 몸을 만들고 있다는 걸 영상으로 찍어서 올리고 있습니다. 작년에도 (고)효준이 형이 제주에서 영상을 찍어 올리면서 PR 했는데, 3월에 취업 성공했습니다. 남들에게 저를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힘겹게 해온 야구이기에 놓을 수가 없다.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도 야구가 안겨다 준 선물이기에.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말수가 없었습니다. 동네야구를 하던 친구가 정식야구를 같이 하자고 해서 5학년 때 마포리틀야구단에서 야구를 시작했죠. 5학년 때는 안타를 하나도 때리지 못했습니다. 6학년 때도 실력이 늘진 않았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대회였던가 거기서 홈런을 때렸습니다. 알루미늄 배트에 맞은 타구음은 아직까지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 저는 홈런을 치는 선수가 됐고, 투수로 몇 이닝을 막는 선수가 됐습니다. 어느 순간 공도 빠른 기대주가 됐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뚝이처럼 넘어지지 않고, 야구와 연이 끊어지지 않았다. “일단 야구를 너무 좋아하고, 야구할 때가 즐겁습니다. 또 야구가 잘되면 적극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김건국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갔다.

최근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방출 선수들을 대상으로 제작한 콘텐츠인 ‘도전! 나는 반드시 프로에 간다!’ 영상도 찍었다. 영하의 날씨에도 힘차게 공을 뿌렸다. “몸에 열을 낸 뒤 힘껏 던졌습니다. (직구 구속이) 140~142km 정도 나왔는데, 롯데 있을 때도 불펜에서 몸을 풀 때는 그정도 나왔고, 실제 경기에 등판하면 146km까진 나왔습니다. 오히려 몸은 더 좋습니다.” 김건국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을 느끼기 충분했다.

가족이란 존재는 김건국이 더욱 열심히 공을 던져야 할 이유다. 아내 노여진씨, 여섯 살이 된 큰아들 리안이, 네 살인 작은아들 리노. 김건국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도 가족의 이름을 새겼다. “큰애가 야구장에 오는 걸 좋아했고, 작년에는 아빠가 롯데 자이언츠 선수라는 걸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아직도 ‘아빠는 롯데 자이언츠냐’고 물을 때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면 ‘아빠는 야구선수이지만, 이젠 롯데는 아니다’라고 말해줍니다. 마음 고생이 심한 아내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그래서 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김건국의 목소리가 잠겼다.

김건국은 후배들과의 경쟁에서도 이겨낼 자신이 있다. 오히려 머릿속은 단순하게 정리가 됐다. “내 몸 상태가 좋으니, 한 번만 보여줄 기회만 있다면 자신은 있다는 생각입니다.” 입단 테스트, 김건국이 이번 겨울 바라는 일이다. 그리고 희망이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 키케로는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김건국의 험난한 야구 인생도 ‘희망’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도전한다는 것도 재밌습니다. 긴장도 되지만, 아드레날린처럼 퍼지는 게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테스트를 통해서 제가 아직 이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 기회를 얻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최선을 다 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김건국은 오늘도 ‘희망’을 던지고 있다.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준철 MK스포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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