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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정유진의 사이시옷] 민주주의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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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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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밤, 소년 티를 벗지 못한 한 앳된 청년이 그 나이 또래의 인파에 둘러싸여 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은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이 그를 향해 비춰주는 휴대폰 불빛 덕분에 선명하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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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 국제에디터


그는 무언가를 힘껏 외치고 있다. 모든 얼굴 근육을 써서 크게 벌린 입은 분명 단호하고 확신에 찬 언어를 쏟아내고 있으리라. 그의 한 손은 가슴 위에 굳게 얹혀 있고, 두 눈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주변에는 그의 말에 박수를 치려는 듯 여기저기 치켜든 손뼉들이 뻗어있다.

AFP통신의 치바 야스요시 기자가 2019년 아프리카 수단의 민주화운동 취재 현장에서 찍은 이 사진의 제목은 ‘올곧은 목소리’(Straight Voice). 2020년 세계보도사진전에서 ‘올해의 사진상’을 받은 이 사진을 본 순간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흔들리지 않는 자기확신과 신념으로 가득 찬 자의 얼굴은 이러하구나. 주위 사람들까지 가슴 벅차오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얼굴. 야스요시 기자도 수상 소감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날 현장에서 그가 (아랍어로) 하고 있는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을 확대해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현듯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사진 속 이 청년의 얼굴은 존경스러울 만큼 감동적이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저런 표정을 짓는 자와 마주친다면 나는 아마 그 사람을 가장 먼저 경계했을 것이다. 49대 51의 마음으로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회의(懷疑)를 거쳐 한발씩 내딛는 것이 아니라, 100%의 확신과 100%의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49대 51로 편을 갈라 싸우는 모습을 요 몇년 새 너무 많이 본 탓이다.

그리고 잠시 멈췄던 스크롤바를 다시 내리기 시작했는데…. 사진 아래 붙은 설명을 읽는 순간 또 한번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 젊은이를 밝히기 위해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젊은이는 시를 낭송하고 있었다.”

“젊은이는 시를 낭송하고 있었다.” 그토록 결연하고 단호하게 무언가를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던 그 청년은 그때 시를 낭송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후예가 아닌가. 아담은 온 인류의 아버지가 아니던가. (…) 손을 들어라, 아담의 자손아. 자유, 평화, 자유.”

그의 단호함은 시를 위한 것이었다. 심보선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시는 “불행한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다시 돌아가야 할, 삶과 노동에 잠재한 행복의 형상을 밝히는 것”이다. 충돌이 예상되는 현장이었지만 그 청년은 ‘타도’를 외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가 믿는 가치를 노래한 시를 낭송하며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토록 확신 가득한 얼굴로. 나는 그 청년의 얼굴이 바로 민주주의의 얼굴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국 사회는 지금 ‘민주주의 꽃’이라는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다. 사진 속 청년 못지않게 단호하고, 확신에 찬 얼굴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 불행한 시대에 우리가 찾아야 할 행복의 형상을 말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단호함은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선된 단어는 혐오를 위해 쓰이고, 시가 사라진 자리엔 말장난만 남았다. ‘개사과’ ‘멸콩’ 무슨 아포리즘도 아닌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덜렁 일곱 글자까지. 우리는 왜 선거를 치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기 위한 싸움이 대통령 선거일 리 없다.

대선 후보 부인의 통화 녹취가 모든 말의 공간을 뒤덮고 있는 지금, 나는 다시 그 수단 청년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수단은 2019년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30년 독재자 오마르 알바시르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곧이어 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또다시 기나긴 싸움이 시작됐다. 수단에서는 지금도 군부의 실탄 사격과 최루탄에 맞서 매일같이 수천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지치지 않고 대통령궁을 향해 행진한다. 사진 속 그 청년은 오늘 어느 곳에서 시를 낭송하고 있을까.

뒷방 늙은이의 넋두리처럼 세계의 민주주의가 퇴조하고 있다는 한탄이 들리지만 그 민주주의는 수단에서, 미얀마에서, 홍콩에서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갈구되고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낭비하고 있는 지금도 그 ‘민주주의의 얼굴들’은 포기하지 않고 싸우고 있다.

정유진 국제에디터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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