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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잔혹하게 매혹적인 '황정민의 광기'···관객은 '악의 포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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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4년만의 재연 연극 '리차드3세'

권력 칼날 휘둘러 친족·가신 죽인

15세기 장미전쟁 시기 피의 군주

굽은 등서 구부러진 손동작까지

흡입력 강한 연기로 무대 휘어잡아

비방·음모론 난무하는 현 시국에

묵직하고 강렬하게 '메시지' 던져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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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만하면 사람 목이 나가떨어지는 참혹한 현장이지만, 주인공이 건네는 천연덕스러운 농담에 관객은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권력을 둘러싼 살벌한 암투와 허 찌르는 웃음이 뒤엉킨 무대에서 ‘피의 군주’는 광기를 무기 삼아 진군하고 또 진군한다. 한바탕 피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 100분에 걸친 악(惡)의 질주를 목격한 관객들 가운데 이 희대 악인의 포로가 되었음을 부인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4년 만에 재연으로 돌아온 연극 ‘리차드 3세’는 그래서 무자비하게 매혹적이다.

리차드 3세는 15세기 영국 장미전쟁 시기의 실존 인물 리차드 3세를 모티브로 한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곡이다. 선천적 신체 결함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언변과 권모술수, 탁월한 리더십을 갖춘 리차드 3세는 친형의 왕권에 불만을 품고, 경쟁 구도의 친족과 가신을 제거해 왕좌에 오른다.

잔혹함과 공포, 그리고 연민까지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며 100분을 전율케 하는 무대의 중심엔 단연 배우 황정민이 있다. 굽은 등과 절룩거리는 다리, 부자연스러운 손동작 등 처음 마주하는 그의 모습은 강렬하다. 그러나 볼품없는 외모가 주는 충격은 오래가지 않는다. 외형이 빚어낸 열등감과 피해의식은 사이코틱한 성격과 욕망의 폭주로 세를 불려 무대와 객석을 집어삼킨다. “세상을 속일 연기로도 왕관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더 악해지겠다”는 극 중 리차드의 다짐처럼 말이다. 상식을 벗어난 피비린내 나는 무대이지만 그 악행이 버겁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황정민은 이따금 객석을 향해 능청스럽게 대사를 던지며 웃음을 유발하고, 그렇게 끓어오르던 광기는 한 박자 숨을 고른다. 능수능란하게 긴장을 요리하는 배우의 흡인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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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감 넘치는 연출 역시 돋보인다. 리차드는 큰형이 작은 형을 죽이도록 하고, 큰형 사후에는 어린 조카들의 목숨마저 빼앗아 왕관을 손에 쥔다. 서재형 연출은 친족과 수많은 가신이 쓰러져가는 과정을 과감하게 압축해 박진감 넘치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빠른 장면 전환에도 불구하고 대형 스크린을 통해 죽음의 순간을 강렬한 이미지로 시각화하면서 빈틈없는 서사를 완성한다.

권선징악이 유효하지 않은 세상임에 더욱 공감하게 되는 시대, ‘세상은 약하고 가난한 자에게 원하는 것을 제때 준 적이 없다’, ‘악을 택하고 선을 그리워하는 것이 낫다’, ‘내 죄를 묻는 그대들의 죄를 묻겠다’는 악인의 대사들은 선악을 떠나 모든 관객에게 공감과 동시에 누군가를 향한 연민의 감정마저 불러일으킨다. 우리 모두 언젠가 상처받고, 소외당하고, 그래서 분노했던 존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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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뒤 큰 선거를 앞두고 온갖 비방과 음모론이 난무하는 시기여서일까.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유독 묵직하게 다가온다. 황정민은 최근 진행된 프레스콜에서 ‘악행은 내가 저지르고 남들에게 책임을 미루기 위한 손쉬운 방법’이라는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다. 리차드 3세는 자기 손엔 피를 묻히지 않고 남을 시켜 악행을 저지른다. 황정민은 “이 대사를 보며 ‘지금도 이런데, (셰익스피어가 작품을 쓴) 그때도 이걸 느끼고 있었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며 “현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줄 수 있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오늘의 세상과 이야기 속 삶은 서로 맞닿아 있다.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한 여인의 절규와 책망 섞인 목소리는 그래서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2월 13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송주희 기자 ss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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