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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송혁기의 책상물림]위언과 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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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위언은 산림에서 나오고, 높은 행적 책 속엔 드무네. 산인은 원래 강직하니 후학이 감히 따를 수 있을까.” 어우 유몽인이 남명 조식을 기리며 쓴 시이다. 여기서 위언이란 조식이 올린 상소문에서 당시 수렴청정으로 권세를 휘두르던 문정왕후를 가리켜 “깊은 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다”고 표현한 것을 말한다. 이를 본 명종이 격노하여 불경죄로 처벌하려 한 것도 당연하다.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위언과 위행을 하며, 나라에 도가 없으면 위행은 하되 말은 공손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위언(危言)과 위행(危行)은 위험을 무릅쓰고 준엄하게 하는 말과 행동이다. 의와 명분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려야 마땅하다는 것이 유가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설득시키지 못할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동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는 실효가 중요한데, 그러기도 전에 말 때문에 화를 입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타산의 보신주의와는 다르다. 어떤 상황에도 위행만큼은 변함없이 실천해야 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조식의 시대는 위언으로 인해 죽을 수도 있는 시대였다. 산림의 선비가 우국충정의 직언을 올리는 언로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 힘이 실려 조식이 처벌되지 않은 것을 보면, 다행히 도가 아주 없는 시대는 아니었다. 왕조시대도, 독재치하도 아닌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말로 인해 신변에 위험을 느끼게 될 가능성은 낮아졌다. 표현의 자유와 사실적시 명예훼손 사이의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사실인지 확인조차 되지 않은 과격한 비난의 말들이 법망의 바깥에 범람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이 도가 없는 시대, 우리에게 더 필요한 건 위언이 아니라 위행이다. 온갖 매체를 통해 확산되는 날선 말들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퍼 나를 수 있다는 면에서 이미 위언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향하는 말은 아껴두고, 지금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작은 실천이 무엇인지 먼저 살필 일이다. 나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위행을 실천하여 그 변화를 이끌어낼 이를 찾아 책임을 맡기는 것. 여전히 이것이 우리가 소망하는 정치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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