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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원장 갑질’에도 처벌 법 없어… 어린이집 교사들 ‘냉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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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권 쥐고 괴롭힘 사례 많아

반성문 종용… 학부모에 험담도

72% “괴롭힘 경험” 직장인 2.5배

가해자는 ‘원장·이사장’이 최다

횡령·학대 처벌만 위탁 취소 가능

“갑질 처벌조항 법률상 명시해야”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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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의 괴롭힘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낍니다.”

경기 화성의 한 국공립어린이집에서 보육교사로 일하는 염모(43)씨는 최근 고용노동청으로부터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인정받았다. 가해자는 어린이집 원장이었다. 염씨는 “3년 전 원장의 미움을 받고 퇴사를 종용받던 다른 교사의 편을 들어준 뒤부터 괴롭힘이 시작됐다”고 회상했다. 원장은 염씨의 사소한 실수에도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거나 반성문을 작성하도록 했고, 원아의 부모에게까지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전했다. 또 근무시간 중 다른 직원과 사담을 나누는 것을 막는다며 교실과 직원 휴게실 사이에 나 있던 창문에 합판을 덧대기도 했다. 결국 고용노동청에 신고해 괴롭힘 피해를 인정받았지만, 현장에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어린이집 운영권은 여전히 원장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염씨가 어린이집을 관리하는 지자체에 문의했지만 “위탁기간이 남아 있어 어린이집 운영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법적 제도가 전혀 없다”며 “그냥 잘 지내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염씨는 “원장들 사이에서 ‘블랙리스트’가 돌아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국공립어린이집인 만큼 지자체가 원장을 바꾸길 원했지만 결국 내가 떠나야하나란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지만, 적지 않은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원장 등으로부터 괴롭힘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지만 대응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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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보육지부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직장에서 괴롭힘을 경험했다는 보육교사는 71.5%(지난해 12월 344명 조사)로 직장인 전체 평균(28.9%·지난해 9월 조사)보다 2.5배 높았다. 괴롭힘이 ‘심각하다’고 답한 비율도 61.8%나 됐다.

조사 결과 괴롭힘 가해자는 ‘원장 또는 이사장 등 어린이집 대표’가 78%로 가장 많았다. 괴롭힘 유형(중복응답)은 △사적 용무 지시·업무 전가·야근 강요 등 부당지시(62.8%) △모욕 및 명예훼손(51.5%) △따돌림 및 차별(42.7%) △폭행 및 폭언(32.8) 등이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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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같은 괴롭힘이 발생했을 때 주변 사람에게 상황을 알리고 의논한다는 응답은 32.1%에 그쳤다. 한 보육교사는 “보육현장에서는 원장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원장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따돌림,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며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한다고 해도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참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국공립어린이집의 경우 지자체가 관리주체이지만, 대부분 개인이 위탁 운영하는 방식이어서 사실상 직장 내 괴롭힘 행위가 발생해도 지자체가 관여하기 어렵다. 어린이집 설립 근거가 되는 영유아보육법은 원장이 보조금을 횡령하거나 아동 학대 관련 범죄로 처벌을 받는 등의 경우에만 어린이집 위탁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원장이 괴롭힘 가해자여도 적절하게 규제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어린이집 원장이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일 때 계약을 취소하거나 재위탁 평가 시 고려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며 “고용노동청으로부터 피해 사실을 전달받을 수도 없어 지자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보육교사들은 영유아보육법에 원장의 괴롭힘 시 처벌조항을 넣고, 국공립어린이집 위수탁 계약 해지사유에 사용자의 직장 내 괴롭힘 조항을 명시할 것 등을 주장하고 있다. 함미영 공공운수노조 보육지부장은 “어린이집 왕국인 원장을 바꿀 제도가 없다면 어린이집은 달라지지 않는다”며 “보육교사들을 괴롭힘에서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종민 기자 jngm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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