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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피란, 그때 그 사람들’ 피란수도 부산의 생생한 이야기...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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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부산시가 한국전쟁 당시 피란수도 부산에서의 생생한 경험담을 수록한 자료집 <피란, 그때 그 사람들>을 18일 발간했다. 부산시가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추진한 연구용역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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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부산 40계단 앞 풍경. 스웨덴 대사관 제공


부경대 구술채록사업단이 2020년 5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피란수도 부산을 경험한 62명을 만나 증언을 수집했고, 이 가운데 생생한 경험담을 소개한 40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자료집을 제작했다.

1부 ‘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다’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황해도 출신 피란민 24명의 경험담을 담았다. 2부 ‘피란수도 부산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다’에는 부산과 인근 지역에서 온 피란민 13명이 기억하는 당시 생활상을 수록했다. 3부 ‘해방된 조국에서 맞은 피란의 기억을 되돌아보다’에는 중국에서 귀국한 독립운동가 가족과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 3명의 부산 정착 과정을 실었다.

구술자들은 제각기 사연을 안고 전쟁을 피해 피란길에 올랐으나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암담한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인민군 징집 도중 탈영해 혈혈단신으로 피란길에 오른 사람, 전쟁고아가 된 사람 등 가족과 헤어져 낯선 부산에서 험난한 피란생활을 감내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스스로 삶을 개척한 사람들이다.

구술자 중 대다수가 1953년 1월 일어난 국제시장 대화재, 그 해 11월 일어난 부산역전 대화재, 1954년 12월 용두산공원 대화재를 목격했거나 참상을 기억하고 있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을 기억하는 구술자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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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부산 부전천변 피란민 판자촌. 스웨덴대사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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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부대 노무자에서 소아과 의사가 된 김동주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난 김동주씨(88)는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부유한 조부모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공산당이 집권 후 토지개혁을 하면서 재산을 몰수당했다. 전쟁이 터진 뒤 인민군에 징집되기 싫어 시골집에 숨어지냈고, 전황이 바뀌어 국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란길에 올랐다. 조부모와 두 동생은 고향에 남겨둔 채 큰아버지 가족과 함께 흥남에서 화물수송선 LST홍천호에 몸을 실었다. 추운 겨울 기름이 흥건한 배 밑바닥에서 끼어 앉아 깡통 하나로 물을 마시고 소변도 봐야 했던 당시 상황이 김씨에게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흥남철수작전은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1950년 12월15일부터 23일까지 흥남항구를 통해 해상 철수한 작전이다). 이틀간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거제도. 김씨는 피란민수용소가 싫어 학도특공대를 자원했다. 김해에서 훈련을 받았으나 두달만에 해산됐다. 김씨는 거제도로 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산항에서 4부두에서 기름통 옮기는 일을 시작했다. 이후 용두산 피란민촌에서 살면서 노점상, 미군부대 청소부로 일했다. 피란민이 세운 천막학교인 명사고등학교를 다녔고 우여곡절 끝에 만 22살에 부산대 의대에 입학했다. 1969년 광안동에 소아과 의원을 개업한 뒤 2002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이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북한의 남겨놓은 동생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2005년 브로커한테 3000불 주고 연변에서 동생을 만났어. 이틀밤을 같이 잤어.” 김씨는 2015년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함북도민회에서 만든 영락공원과 기념관 재정비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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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식사 배급을 기다리는 부산 우암동 피란민촌 아이들. 스웨덴대사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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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란민에서 서전병원 간호사가 된 김옥순

“사람들을 우리가 보는 앞에서 밧줄로 엮어다가 마을 우물에 한 사람을 집어 넣으면 주르룩 사람이 딸려 들어가는 거야. 집집마다 길에 있는 우물에는 다 송장이 들어간거지. 온 마을에 사람 썩는 내가 말도 못하게 났어.”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옥순씨(96)는 남쪽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고향마을 사람들이 인민군에게 죽임을 당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김씨도 흥남철수 때 가족과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거제도로 왔다. 장승포에서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세브란스간호원 양성소에 들어갔다. 당시 세브란스의대는 부산에 본부를, 병원과 간호학과는 거제에 설치했다. 거제야전병원에서 일하다 1953년 지인의 소개로 부산 서전병원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서전병원은 스웨덴이 1950년 세운 병원이다. 김씨는 간호사일을 하면서 남편과 함께 여성들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

“이남에 와서 보니까 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 미군 장교와 사는 여자들 중에도 글을 몰라 답답해 하는 사람이 많았어.”

김씨는 은퇴 후 당감동에서 20년간 부녀회장직을 맡아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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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부산 국제시장 신창여관 앞 상가거리 풍경. 부산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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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기지로 전쟁의 바다를 건넌 설분선

고향인 설분선씨(87)의 고향 황해도 연백은 1945년 38선이 그어질 때만 해도 남한 땅이었다.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북쪽 땅이 됐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탈환 후 북으로 퇴각하던 인민군이 설씨의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북으로 데려가려 했다. 설씨의 모친이 기지를 발휘해 수수밭에 숨어 있다가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증산도로 숨었다. 여기서 목선을 얻어 타고 6명이 남한으로 내려왔다. 미리 피란을 떠난 오빠들은 김해에서 재회했다. 오빠들은 어깨와 다리에 총상을 입고 김해로 이송된 것이었다. 오빠들이 부산 하얄리아부대에 취업하게 되면서 부산 범내골의 삶이 시작됐다. 설씨는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삼성메리야스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주로 실을 감거나 목덜미 부분을 재단가공하는 일이었다. 미군부대 여자 문관이 되고 싶었지만 집안의 가장인 큰 오빠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평안도 사람과 결혼한 뒤 우암동에 자리를 잡았다. 우암동은 함경도 피란민이 가득한 곳이었다. 스웨터를 짜는 기계 ‘요코아미’를 들여놓고 공장을 운영했다. 현재 설씨는 치매예방 보건소에 다니며 뇌건강을 위해 며느리와 손녀에게 손편지를 쓰고 있다. 새로 시작한 글쓰기이지만 문학소녀로의 창의성과 작가의 감성을 키우고 있다. 할머니 작가의 등단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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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부산 좌천동에서 물배급을 기다리는 피란민. 부산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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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후손의 피란생활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권혁우씨(78). 권씨의 할머니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성녀 여사이다. 안 여사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로부터 고문을 당했지만 중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국내에는 자료가 거의 없어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권씨는 해방 후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서울 쌍림동에 정착했으나 1·4후퇴 때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정착했다. 부산시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에게 일제가 남기고 간 영도의 적산가옥을 마련해줬다. 생계가 여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강냉이죽, 말린 강내이빵으로 쑨 죽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휴전 후 1954년 안 여사가 별세하면서 시로부터 받던 지원도 끊어졌다. 1977년 권씨의 모친인 오항선씨가 서훈을 받게 되면서 독립유공자를 위한 대연동 광복촌에 입주할 수 있었다. 권씨는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뜻을 기리기 위해 추모기념사업회를 설립해 활동을 하고 있다.

권기정 기자 kw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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