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아침햇발] 대선, 적과 동지의 시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살바도르 달리, <내전의 예감> 1936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이세영 | 논설위원

“정치적 행동과 동기의 원인이 되는 특정하게 정치적인 구분이란 적과 동지의 구분이다.”(카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

나치의 ‘계관법학자’로 불린 슈미트(1888~1985)는 정치에 관해서라면 악마적일 만큼 차가운 현실주의자였다. 도덕과 미학이 각각 선-악, 미-추의 범주적 구별에 기초하는 것처럼, 그는 정치 역시 우-적의 구분을 바탕으로 작동한다고 봤다. 후대의 많은 학자와 정치가들이 그의 정치관에 영향을 받았지만, 현실의 공적 담론에서 슈미트식 정치 인식은 좀처럼 자리잡기 쉽지 않았다. 불화와 갈등으로 얼룩진 현실의 정치판도, 공적 담론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순간 ‘대화와 토론으로 이견을 좁혀 공통의 이해에 도달하려는 합의 절차’로 이상화되는 탓이다. 속내야 어떻든 대부분의 정치인이 자기 정치의 최고 목표로 ‘국민 통합’을 내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갈라치기 고수’라 평가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도 재임 기간 ‘국민대통합위원회’를 직속 기구로 운영했다.

그러나 공직과 정책수단의 점유권을 두고 후보와 정당들이 쟁패하는 선거에서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승복과 화해, 통합이란 당위는 결과가 확정된 뒤에나 고민하면 될 뿐, 선거의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승리, 패배, 진영, 전략 같은 전쟁의 언어들이다. 같은 캠프에 몸담은 이들이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동지’라고 부르던 정치판 관행에도 이유가 있다. 선거는 형님 동생 하던 한 골목 자영업자, 같은 팀 조기축구 회원끼리도 적과 동지로 갈라서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최상위 권력의 향배를 가르는 대통령 선거는 사회 전체의 갈등적 에너지가 응집되는 열정의 쟁투장이자 각각의 진영이 보유한 전략과 인적 자산, 자금, 조직, 담론, 정책 자원이 총동원되는 합법적이고 제한적인 내전(시민전쟁)이다.

중요한 건 모든 전쟁에는 막대한 비용과 희생이 뒤따른다는 사실이다. 대선 역시 마찬가지여서 5년마다 나라가 쩍쩍 갈라지는 파열음이 들리고, 포연이 걷힌 뒤엔 곡소리와 함께 이민 가방 싸겠다는 이들이 도처에 속출한다. 그러니 기왕 감수해야 할 전쟁이라면 ‘제대로’ 치러야 한다. 그 ‘제대로’의 관건은 공동체의 최다수 구성원이 연루된 중추적 균열선을 따라 싸움의 주전선이 형성되도록 잠재된 갈등을 조직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고도로 산업화된 자본주의 국가의 핵심적 갈등은 당연히 사회경제적 이슈를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갈등은 지난 세기에 견줘 한결 중층화되고 복잡해졌다. 전통적인 노사 갈등에 자산소득자와 근로소득자, 고용된 자와 고용되지 않은 자, 중심부와 주변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 사이의 격차와 차별이 겹겹이 누적된 탓이다. 인구절벽으로 상징되는 재생산 위기, 전세계가 공통의 현실로 맞닥뜨린 기후변화, 온전한 시민권을 확보하려는 소수자 집단의 요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문화전쟁 역시 규모와 격렬함에선 여타의 사회경제적 이슈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2022년 한국 대선의 현실은 어떤가. 불평등과 차별, 인구절벽과 기후위기 같은 중핵적 갈등 이슈들은 좀처럼 유권자층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한다. 대신 회자되는 것은 여당 후보 주변 인물들의 잇따른 죽음을 소재 삼은 자극적 음모론, 야당 후보 배우자의 말과 행적을 집요하게 파헤쳐서 빚어낸 ‘품행’ 이슈들이다. 여야가 모두 전열을 펼쳐 상대의 본진과 맞붙는 정면 승부보다, 은폐된 약점과 급소를 찌르는 ‘한방’에 매달리고 있으니, 싸움을 통해 내 삶이 달라질 수 있으리란 기대가 생겨날 리 없다. 넘쳐나는 것은 정치에 대한 냉소와 환멸, 상대 진영에 대한 감정적 증오뿐, 이 불모의 토양에서 피어나는 것은 “윤석열 당선은 최순실 공화국의 부활” “이재명은 나라를 결딴낼 파시스트” 같은 협박과 협잡의 언어들이다.

우리가 대선이라는 5년 주기 내전을 기꺼이 감내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공공정책의 형태로 실현되는 승자 집단의 다수 의지가 공동체의 잠정적 평화상태와 더불어 개인 삶의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다. 지금 그런 기대를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이 소모적 내전에 참전하길 거부하는 이들의 선택 역시 존중 못 할 까닭이 없다. 삶과 무관한 전쟁에 인민의 열정과 에너지를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monad@hani.co.kr

벗 덕분에 쓴 기사입니다. 후원회원 ‘벗’ 되기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주식 후원’으로 벗이 되어주세요!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