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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손자만은 험한 일 안 하길”…이주민을 위한 사다리는 없다[히어로콘텐츠/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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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③

공존-세 번째 이야기 : 이주민을 위한 사다리는 없다

할아버지-엄마에겐 차가웠던 ‘기회의 땅’
16세 소년은 꿈꾼다… 한국서 따듯한 일상


동아일보 디오리지널 페이지(https://original.donga.com/2022/together_intro)를 방문해 보세요. 다양한 사진과 영상, 인터랙티브 효과가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기사로 공존 시리즈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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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경기 안산시 선일중학교 3학년 이고리 허가이가 교실 벽에 걸린 태극기를 향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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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저에게 맞는 과를 찾고 싶어요. 그렇다고 제가 안정적인 회사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지난해 12월 어느 날, 경기 안산시 선일중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원서를 쓴 뒤 진로 상담을 하던 허가이 이고리(16)의 목소리가 유난히 작아졌다. 평소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달랐다.

이고리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 4세다.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장점을 살려 통역가를 꿈꾼다. 목표 대학도 정했다. 한국외대나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러시아어를 잊지 않으려 집에선 엄마와 러시아어로 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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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꿈도 외삼촌을 생각하면 사그라진다. 외삼촌은 우즈베키스탄 현지 대학에서 한국어학과를 나와 한국에서 러시아어 통역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외국인 입국이 급감하며 일감이 끊겼다. 지금 택배 배송을 하고 있다.

‘대학을 나와도 한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일하는 게 어려운데 졸업장조차 없으면… 나도 삼촌처럼 될 수 있겠구나.’

이고리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꼭 한국의 좋은 대학에 가리라고 마음먹는다.

“할 수 있어.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하잖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구의 6분의 1을 네 땅으로 만들 수 있어.”

상담을 해주던 임미은 선생님은 이고리를 격려했다. 하지만 이고리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 이고리가 과연 좋은 대학에 가 일감 끊길 걱정 없는 직장에 취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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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시에서 주최한 줄넘기대회에서 받은 상장을 들고 있는 이고리. 이고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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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리 같은 해외동포 자녀는 특성화고 진학을 선호하는 편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다. 특성화고 졸업 뒤엔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 수 있다.

한국어 실력이 부족해 실습 중심인 특성화고를 택하는 아이들도 있다. 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 중도입국 청소년들이 주로 그렇다.

선일중에서도 지난해 이주배경 학생 52명 중 24명은 특성화고를 지망했다. 특성화고 지망생은 예년보다 줄긴 했다. 경기도 내 일반고도 학비가 무상이 됐기 때문이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망설이던 이주배경 학생들도 일반고에 지원하게 됐다.

“이주배경 아이들은 고등학교 등하교 교통비조차 부담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아요.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죠. 일단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외국인전형으로 대학 가긴 비교적 수월하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해요.”(임미은 선생님)

이고리는 그럼에도 일반고에 가기로 일찌감치 결심을 굳혔다. 이고리가 1지망으로 쓴 고등학교는 중상위권 성적의 학생들이 지망하는 학교다. 사실 담임선생님은 다른 학교를 추천했었다. 이고리가 내신에서 불리해질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이고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학습 분위기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다.

이고리는 꼭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 엄마 김 옥사나 씨(42)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다. 엄마는 이고리에게 늘 말한다.

“너는 힘든 일 하며 살지 말아라.”

담임인 장군휘 선생님은 이고리의 타고난 언어 감각과 승부욕을 칭찬했다. 언젠가 그 자질이 빛을 발할 것으로 믿는다.

“한국도 단일민족국가에서 다인종국가로 변화하고 있어요. 앞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게 되겠죠. 이고리의 이중언어 능력, 활발한 성격은 선입견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4년에 걸친 ‘한국인 되기’

이고리는 세 살 되던 해인 2009년 엄마를 따라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올해 13년째를 맞는다. 가족들과는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한국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오히려 러시아어가 어색하다. 가족들이 놀릴 정도다.

“이고리, 러시아 발음 어색해졌네.”

이고리는 겉보기엔 한국인이지만 법적 한국인은 아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엄마는 해외동포가 받을 수 있는 F4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뒤 한국인 아버지와 재혼했다. 엄마가 재혼한 뒤 한국에서 낳은 동생도 한국인이다.

“전 우리 집에서 돌 같은 존재였어요. 아버지와 동생은 한국인이죠. 엄마도 동포비자가 있어 한국인이나 마찬가지고요. 저만 외국인이었죠.”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고리 같은 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 4세는 체류 자격이 불안정했다.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F4비자를 받으려면 한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을 나와야 했다. 이고리는 이 조건을 채우지 못해 10년 넘게 어머니의 동반 가족 자격(F1비자)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F1비자는 취업 등 경제 활동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이고리는 1년 마다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비자를 갱신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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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그에게 올해 선물같이 체류 자격이 주어졌다. 법무부가 이달 3일부터 국내 초·중·고교를 다니는 중국 및 고려인 동포의 미성년 자녀들에게도 F4비자를 부여하기로 했다. F4 비자로는 이고리가 원하던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다. 체류 기간도 3년마다 연장할 수 있다. 기존에는 러시아 국적의 고려인에게만 나이와 상관없이 F4가 주어졌다. 이고리와 같은 중앙아시아 국적의 미성년 고려인은 한국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F4비자가 나왔다. 법무부는 러시아 국적 동포에게는 러시아의 경제규모가 크고 신규 불법체류자 발생 비율이 낮다는 이유로 F4비자를 주고 있다.

이고리는 다행히 체류 자격을 얻었지만 운이 좋은 경우다. 미취학 아동이나 언어 또는 경제적 문제로 학교 밖으로 밀려난 이주 아동들은 이 혜택을 못 받는다. 법무부는 체류 자격을 주며 조건을 달았다. ‘국내 초·중·고교에 재학해야 F4비자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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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산시 선일중학교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 이 학교 3학년 아딜벡(왼쪽)과 이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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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시 고려인지원센터 ‘너머’의 김영숙 센터장도 이 점을 안타까워한다.

“한국어 실력 부족으로 학업을 따라가지 못해 학교를 그만둔 학교 밖 고려인 청소년들이 정말 많아요. 똑같은 동포인데 국적에 따라 체류 자격을 달리 주는 것은 차별이에요.”

법무부는 F4비자를 부여할 중앙아시아 국적 고려인 범위를 점차 넓혀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고리는 간신히 체류 자격을 얻었지만 여러 편견과 싸워야 한다. 법적 한국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야, 넌 군대 안 가도 되는데 왜 비자 바꾸려고 하냐.”

친구들은 질투 반, 부러움 반이 담긴 농담을 하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수록 이고리 마음에는 다짐이 생긴다.

‘반드시 떳떳한 한국인이 되고 말아야지.’

이고리는 F4비자를 받아 병역의무가 생기면 꼭 해병대에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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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경기 안산시 선부동의 한 공원에 모인 이고리네 가족. 이고리, 어머니 김 옥사나 씨, 외할머니 이 로자 씨, 이고리의 동생 구수빈 양, 외할아버지 김 게오르기 씨. (뒷줄에서 반시계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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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리의 외할아버지인 고려인 2세 김 게오르기 씨(65)도 손자의 고민을 알고 있다. 평범한 한국인으로 좋은 직장, 좋은 가정을 꾸리려는 손자의 분투를 이해한다. 게오르기 씨도 고향에선 ‘엘리트’였지만 한국에 온 뒤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오르기 씨는 이고리가 한국에 오기 1년 전인 2008년 한국 땅을 밟았다. 51세, 남들은 은퇴를 꿈꿀 만한 나이였다. 하지만 아내 이 로자 씨(62)가 당뇨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제대로 치료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오르기 씨는 먼저 한국으로 유학 간 아들의 생계도 돕고 싶었다.

결국 큰 결심을 했다. 타슈켄트 국립사범대 역사학과 졸업장, 교장까지 지낸 교육자로서의 커리어, 방 4개짜리 아파트, 자동차, 별장까지 모두 가족을 위해 버렸다. 그렇게 한국으로 떠나왔다.

‘할아버지의 땅’에서 그의 첫 일터는 부산의 한 조선소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 13시간 동안 20kg 가까운 장비를 들고 일했다. 매일 밤 손이 저렸다. 게오르기 씨는 끙끙 앓다 몇 달 만에 일을 그만 뒀다. 하지만 부족한 한국어로는 변변한 일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쌀 농장, 간장 공장, 건설 현장까지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선 펜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와선 돌과 쇳덩이를 들었어요. 식용 개 축사에서 일하던 시절은 죽을 때까지 못 잊습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그를 힘들게 한 건 무너진 자존심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이주노동자 김 씨’가 됐다. 조선소 일자리를 그만두고 일했던 총각무 농장에서는 농장 주인이 퍼붓는 욕설을 견뎌야 했다.

“한국어를 못 하니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한국에 오기 전엔 내가 고려인,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오고 나니 아니었어요.”

막상 한국에 오니 철저한 이방인임을 실감한 게오르기 씨. 그래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국에서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어.’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은 할아버지의 땅’이라는 가족들의 말을 듣고 자랐다. 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가르치곤 했다. “한국이 우리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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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리의 할아버지 김 게오르기 씨(왼쪽)와 할머니 이 로자 씨(왼쪽 사진). 함께 여행을 떠난 이고리의 할아버지와 이고리 사촌동생, 할머니 그리고 이고리(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이고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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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옥사나 씨에게도 ‘미래의 땅’ 한국은 녹록지 않았다. 옥사나 씨는 우즈베키스탄 현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한국어가 능숙지 않은 그가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처럼 험한 일뿐이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F4비자 소지자는 경제 활동은 가능하지만 청소, 포장, 주방보조 같은 단순 노무에는 종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력사무소를 수십 군데 돌았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그의 사정을 딱히 여긴 안산의 한 공장 대표가 몰래 일을 줬다. 옥사나 씨는 3년간 제품에 필름 부착하는 단순 작업을 하며 지냈다. 출입국사무소에서 미등록 노동자 단속을 나왔을 땐 창고에 숨어야 했다. 적발되면 비자가 취소돼 출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은 아직도 그에게 상처로 남아 있다. 어느 날 공장에서 상사가 그의 엉덩이를 쓱 만지고 지나갔다. 당장 쫓아가 소리를 질렀다.

“나도 열심히 일해요. 내가 외국에서 살았다고 이렇게 해요? 나도 아빠 있어요. 경찰에 신고해요.”

게오르기 씨와 옥사나 씨 부녀는 있는 힘을 다해 돈을 벌었다. 하지만 어린 이고리를 먹이고 입히고, 로자 씨 병원비를 대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네 가족은 입국한 뒤 5년이 넘도록 원룸살이를 했다. 옥사나 씨가 공장 동료였던 한국인 남편과 2013년 재혼한 뒤로는 분가를 했지만 월세로 산다.

이고리는 집에서 공부할 공간도 변변찮다. 이고리의 방엔 책상과 침대를 놓을 공간이 없다. 이고리의 무릎 높이에도 미치지 않는 작고 낮은 테이블 하나가 전부다. 집에서 공부할 공간이 없어 이고리는 시험 기간에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한다. 그래도 이고리는 긍정한다.

“오히려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요. 매일 바닥에서 공부하다 보면 나중에 ‘진짜 책상’에 앉게 됐을 때 얼마나 더 감사하겠어요.”

#1. 한국어가 서툴러 출신국 경력을 살리지 못한 채 단순 노무에 종사한다.
#2. 열악한 노동 환경에 지쳐 한국어를 배우지 못한다.
#3. 한국어가 부족하니 더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런 악순환을 이고리 가족은 충분히 경험했다. 열심히 노력해도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날 ‘사다리’가 없었다.

기회가 없진 않았다. 옥사나 씨는 법무부의 ‘사회통합프로그램(KIIP)’을 이수하면 영주비자(F5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어, 한국문화, 한국사회 이해 교육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이수하기엔 버거웠다. 465시간가량 교육을 받고 시험에서 일정 점수를 취득해야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낮엔 공부하고 밤에는 아이를 돌보며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장 생계가 너무 급했다.

“일하고, 이고리 밥 주고, 그러면 주말에 공부할 시간 딱 4시간 있었어요. 그래서 공부 잘 못 했어요. 4단계까지는 합격했는데 5단계에서 떨어졌어요. 5단계 붙으려고 야간에 일하고 집에 와서 밤새 공부했는데…. 그래서 이고리가 어렸을 때 혼자 컸어요.”(옥사나 씨)

김영숙 센터장은 이주민들이 사회경제적 지위를 대물림받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고려인들은 현지 동화 정책으로 한국어가 서투르고 한국문화에 익숙지가 않아요. 좋은 일자리를 잡기가 힘들죠. F5비자를 받으려면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는 고려인이 대부분입니다.”

고려인 비중이 높은 안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도 사다리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을 걱정했다.

“고려인 아이들에게 앞으로 ‘뭐 하며 살고 싶냐’고 물어보면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일을 보며 꿈을 키우는데, 마땅한 롤 모델이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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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 동생 수빈이까지 온 가족이 모여 외식을 했다. 할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져 목소리를 높였다.

“난 결국 성공했어요. 아들도 잘 살고 있고, 딸도 한국인 남편이랑 결혼해 한국에서 살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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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함께 경기 안산시 원곡동의 한 식당에서 외식을 하고 있는 이고리네 가족. 왼쪽부터 이고리 어머니, 외할아버지, 이고리, 그리고 외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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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씨에게 성공은 그런 것이다. 자식들이 ‘온전한 한국인’이 돼 한국 땅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 그가 13년 동안 부드럽던 교사의 손을 굳은살이 알알이 박인 노동자의 손과 바꿔 얻어낸 성공이다. 그에게 손자 이고리는 성공의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이다.

“아들, 딸이 편히 살면 난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내 딸이 잘 살기 위해서는 이고리가 공부를 잘하고 좋은 직장을 가져야 돼.”(게오르기 씨)

“이고리는 대학교를 꼭 한 개는 가야 해. 하나라도 붙어서 공부해야 해. 그래야 힘든 일 안해.”(로자 씨)

“나중에 우리 아들 통역 일 같은 거 하면 얼마나 좋아요. 제가 회사 다니면서 얼마나 힘들었어요. 우리 아들 대학 공부해서 나중에 성공하면 좋잖아요.”(옥사나 씨)

이고리만은 단순 육체노동이 아닌 ‘편한 일’을 하기를. 성공하기를. 그게 이고리 가족이 ‘사다리’를 오를 유일한 기회다. 가족들 말을 듣던 이고리가 말했다.

“제가 우리 가족의 마지막 남은 희망인 거죠.”

26년을 이방인으로 살다

26년간 3대가 한국에서 살았다
여전히 딸과 손자, 손녀는 추방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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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비자 체류기간 연장을 마친 어티겅도야 씨가 서울 양천구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을 나와 길을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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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리의 가족처럼 할머니부터 손주까지 3대가 한국에서 성실하게 살아도 불안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저소득층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국에서는 학사, 석사를 취득한 엘리트여도. 한국에서 20년 넘게 사고 없이 열심히 일해도….

26년째 이방인처럼 한국에 살고 있는 치메도르치 어티겅도야 씨(60) 가족이 그렇다. 1996년 몽골에서 한국에 와 가정을 이뤘다. 그는 다행히 체류 자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딸, 손주들은 모두 미등록(불법체류) 신분이 될 위기다.

어티겅도야 씨는 지난해 10월 28일에도 어김없이 출입국사무소를 찾았다. E7비자 연장을 위해서다. 매년 찾는 곳이지만 사무소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부터 손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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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0일이 지나면 내가 불법 되는 거야. 출입국사무소는 너무너무 무서운 곳이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갈 때마다 벌벌 떨면서 가.”(어티겅도야 씨)

함께 온 몽골학교 선생님 2명까지 무사히 비자 기간 연장을 마쳤다. 이들은 출입국사무소 밖으로 빠져나와 비로소 손을 마주 잡고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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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서울 양천구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에서 비자 체류기간 연장을 마친 뒤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는 어티겅도야 씨(오른쪽)와 몽골학교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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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티겅도야 씨는 1996년 세 살, 열세 살이던 두 딸을 두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몽골에서 사범대를 졸업하고 대학 강사로 일했다. 하지만 월급만으로는 두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가 힘들었다. 산업연수생 제도도 있었지만 문이 좁았다. 어티겅도야 씨는 가난을 탈출하려 무작정 관광비자만 믿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 미싱공장에 취업했다. 번 돈은 월세와 두 딸을 위해 몽골로 부친 생활비로 다 나갔다. 관광비자 연장을 위해선 3개월마다 몽골로 돌아가야 했지만 비행기표 살 여유가 없었다. 결국 관광비자를 연장 못 해 미등록 신분이 됐다. 매일 머리를 맞으며 일해야 했다. 공장 앞 공중전화에서 두 딸과 통화하는 시간이 유일한 낙이었다. 어티겅도야 씨는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시비를 거는 한국인 동료들의 텃세를 버티지 못하고 6개월 만에 공장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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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어티겅도야 씨(오른쪽). 어티겅도야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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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곳을 찾던 그를 구원한 건 역설적이게도 남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월 40만 원을 받으며 서울외국인근로자선교회에서 통역 봉사를 시작했다. 2년 동안 선교회의 권성희 목사와 전국을 돌았다. 임금체불을 겪는 외국인 노동자, 남편에게 맞은 결혼이주 여성들의 통역을 맡았다.

“당시 이주노동자 10명 중 9명은 임금체불을 겪었어요. 어티겅도야 본인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이주민 신분이었지만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도왔죠. 한국어를 못 하는 이주노동자를 대신해 공장까지 찾아갔어요. 임금을 주지 않는 공장주와 싸웠어요.”(권 목사)

정의감 강한 그에게 미등록이란 신분은 늘 목에 걸린 가시였다. 1999년 선교회가 재한몽골인학교를 세우면서 그도 선생님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안정적으로 일할 곳이 생기자 몽골로 떠나 관광비자를 재발급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3개월마다 입국과 출국을 반복하다 2005년 E7비자를 받게 됐다. 재한몽골인학교에서 외국인 선생님으로 일하며 비자 발급 대상인 외국인 전문인력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산 지 10년 만에 어렵사리 미등록 신분을 벗어났다.

어티겅도야 씨는 F4비자는 받았지만 이보다 더 안정적인 영주권을 취득할 생각도 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소득이다. F5(영주)비자를 취득하려면 연 소득이 전년도 1인당 국민총소득(GNI) 이상이어야 한다. 2021년 F5비자를 신청할 경우 연 소득은 3만1881달러(약 3788만 원)를 넘어야 한다.

이주민들은 한국어 실력이 부족해 단순 노무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영주비자 발급에 필요한 소득 요건을 갖추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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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학교 학생들과 어티겅도야 씨(아래줄 가운데). 어티겅도야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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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학교를 세운 서울 광진구 나섬교회의 유해근 목사는 어티겅도야 씨가 안정적인 신분을 갖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몽골학교 선생님 중 한국에 들어온 지 가장 오래됐고, 한국어가 유창해 가장 영주권을 딸 가능성이 높은 분이에요. 하지만 교사 월급으로 영주비자가 요구하는 소득 요건을 맞출 수 없죠.”

대물림되는 미등록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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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천구 서울 출입국·외국인청 앞 카페에 앉은 어티겅도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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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비자 갱신 이후 한 달여 만에 만난 어티겅도야 씨는 왼쪽 발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집에서 넘어져 왼쪽 네 번째 발가락이 부러졌다고 했다.

서울 지하철역 광나루역에서 대로 사이 골목으로 굽이돌아 15분 정도 걸어 그의 옥탑방에 도착했다. 계단은 난간을 잡지 않고서는 오르기 힘겨울 정도로 가팔랐다.

어티겅도야 씨는 학교에 출근을 했다가 손녀까지 어린이집에서 하원시켜 오는 길이었다. 그는 깁스한 발을 절뚝이며 옥탑방 계단을 힘겹게 올랐다.

옥탑방 외벽은 초겨울 찬바람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헐거운 틈 사이로 바람이 새고, 파이프가 얼어 따뜻한 물이 잘 안 나올 때도 있다. 바람이 많이 불면 천장이 깨질 듯 흔들린다. 그래도 어티겅도야 씨에게 이 집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살게 된 ‘집 같은 집’이다.

“16평 정도 될까. 그래도 남편이랑 살기에 넓어. 방도 세 개야. 저쪽 방은 손주 놀이방이야. 옛날엔 지하방 원룸 살았어. 냄새도 엄청 났고 벌레들이 기어 다녔어. 어떨 때는 벌레가 귀로 들어가기도 했어.”

미등록에서 E7비자로, 지하방에서 옥탑방으로, 미싱공장에서 몽골학교로. 어티겅도야 씨는 피나는 노력과 인내로 체류 자격을 얻어냈다. 하지만 어티겅도야 씨의 얼굴에 진 그늘은 여전하다. 자신이 26년간 겪은 불안과 고통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첫째 딸 자야(가명·39)와 손자, 손녀 때문이다.

자야 씨는 몽골 현지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미국 캘리포니아대(CALMUS)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한국에 정착한 엄마와 여동생을 따라 2016년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제대로 공부해 보겠다는 꿈이 컸다.

“K팝, K스타가 세계적으로 유명하잖아요.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공부해서 나중에 몽골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그대로 접목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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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티겅도야 씨(오른쪽)와 그의 첫째 딸. 어티겅도야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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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까지 마친 자야 씨는 석사 졸업 뒤 2년간 한국에서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졌다. 하루에 세 곳씩 지원서를 넣었다. 무역, 마케팅, 통역 등 직군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인인 그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올해 초에야 스마트폰을 수출하는 무역회사가 그를 채용했다. 이제 외국인 전문인력이 받는 E7비자를 받을 자격이 됐다. 안정적으로 국내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야 씨는 이제야 몽골, 미국,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두루 섭렵한 인재로 인정받는 순간이 오나 싶었다.

하지만 꿈은 순간 물거품이 됐다. 자야 씨가 E7비자를 발급 받으려고 출입국사무소에 과거 소득 자료를 제출할 때였다. 사무소 직원은 자야 씨가 D2비자를 소지한 채 아르바이트한 사실을 문제 삼았다. D2비자 소지자는 단순 아르바이트도 당국에 신고해야 하는데 신고 없이 일한 점이 불법이란 설명이었다.

결국 자야 씨는 첫 출근도 못한 채 직장을 그만뒀다. 그의 비자가 만료되면서 남편과 두 아이의 동반비자(F3)까지 박탈됐다. 자야 씨 부부와 아이들 모두 미등록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는 현재 체류 자격을 얻으려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 나라에 해 안 끼치고 합법적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미등록이 안 되려고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는데….”

딸에 이어 손자와 손녀까지 미등록 위기에 처하며 어티겅도야 씨의 시름도 더 깊어졌다. 자야 씨가 행정소송에서 패하면 비자를 연장 받지 못한다. 손주들도 몽골로 가야 한다.

손자 유루티츠(우주라는 뜻의 몽골어)가 특히 걱정이다. 유루티츠는 세 살 때 한국에 와 어느덧 아홉 살이 됐다. 손녀는 2020년 한국에서 태어나 쭉 자랐다.

“애들은 한국이 자기 나라나 다름없어. 자기 엄마랑 얘기할 때 ‘나는 몽골 안 가고 싶어요. 한국에 있고 싶어요’라고 한대. 그래서 매일 밤 제가 하나님한테 기도해요. ‘하나님, 너무 욕심 안 부릴 테니까 우리 딸이랑 손주 2, 3년 만이라도 한국에 있게 해 주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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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티겅도야 씨(왼쪽)와 그의 손자 유루티츠. 어티겅도야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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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를 벗어나 헤엄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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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학교 수업이 끝난 뒤 이고리가 하교를 위해 신발을 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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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이주배경 아동들이 한국 사회의 ‘하류’에 갇히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체류 자격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정부도 미등록 아동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해 미등록 이주아동이 일정 요건을 갖추면 특별 체류를 허가하겠다고 발표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20년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강제퇴거를 중단하고 구제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뒤다.

하지만 유루티츠는 미등록 신분이 되더라도 구제받을 수 없다. 구제책은 한국에서 태어나 15년 이상을 국내에서 체류하며 초등학교를 졸업해야 적용된다. 게다가 2025년 2월까지만 한시적으로 시행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구제책에 대해 “2만 명으로 추산되는 미등록 이주아동 중 500명 이하 소수의 이주아동만 구제할 뿐”이라고 평가했다.

시민단체와 법조계에서도 비판이 나온다. 안산 원곡법률사무소의 최정규 변호사는 정부가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국내에서 출생했든 중도입국 아동이든 본인 의지와는 관계없이 미등록 신분이 됐다는 점은 같습니다. 이는 출생지로 차별을 하는 셈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며 받는 상처와 혼란을 생각해야 합니다.”

안산에서 다문화교회를 운영하는 박천응 목사는 이고리, 어티겅도야 씨의 손주들 같은 이주가정 자녀들을 ‘저수지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부모 세대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사회의 저층에 고인다는 의미다.

“이주배경 아이들의 부모님 세대는 본국에서 유능했어도 한국어나 체류 자격 문제로 대부분 단순 노동에 종사합니다. 경제적 문제로 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죠. 공단 지역 노동자들의 자녀는 공단 인력의 저수지예요. 부모에 이어 공단 노동자가 되는 악순환에 빠지는 거죠.”

이고리의 고등학교 진학, 자야 씨의 대학원 석사 취득. 이 모두 저수지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인 셈이다.

이고리는 이제 꿈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딜 준비를 하고 있다. 일반고 진학을 시작으로 대학을 나오고 통역사가 될 것이다.

석사학위가 두 개나 있고 미국 유학까지 했지만 취업이 어려웠던 자야 씨처럼 사다리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고리는 자기 이름의 뜻을 생각한다. ‘이고리’는 그리스어로 ‘지킨다’는 의미다. 엄마와 가족들을 지킬 수 있도록 강해지고 싶다.

“뭔가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전 제 가족을 지키는 강함을 가진 사람이 될 거예요.”



공존 - 네번째 이야기 : 나는 인도네시아계 한국인입니다 1월 19일 공개

이고리처럼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 군대는 가야지”라고 말하며 해병대에 간 인도네시아계 한국인 청년이 있다. 갓 스무 살, 남들은 피하지 못해 안달인 군대를, 그것도 해병대를 왜 자원해서 가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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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취재 : 이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 송은석 남건우 기자
▽동영상 편집 :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
▽그래픽 : 김충민 기자
▽프로젝트 기획 : 위은지 기자
▽사이트 제작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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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철 기자 hcshin@donga.com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남건우 기자 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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