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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英총리의 운명, “神의 대리인”이라는 그녀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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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문턱도 못간 그레이 차관의 ‘송곳 조사’에, 옥스브리지 출신 정치인‧관료들 벌벌

코로나 봉쇄(lockdown) 명령을 어기고 총리 관저에서 수차례 파티가 열린 것이 드러나, 궁지에 몰린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58)의 정치적 운명이 한 여성 고위 공무원의 손에 달렸다.

존슨 총리는 지난 12일 의회 대정부질문에서 “2020년 5월20일 관저 정원에서 열린 음주 파티에 참석했다”고 사과하면서도 “업무적인 행사라고 믿었다”고 변명했다. ‘다우닝 10번지’로 통칭되는 총리 관저에선 이밖에도 2020년 12월 크리스마스 파티와 작년 4월 직원 고별 파티 등 최소 4차례의 파티가 봉쇄 기간 중에 열렸다. 이른바 ‘파티게이트(partygate)’다.

조선일보

보리스 존슨 총리의 '파티게이트' 의혹을 조사하는 수 그레이 내각부 제2차관. 대학 문턱에도 가지 않고 말단 공무원부터 시작해 차관 직책에 오른 그레이는 옥스퍼드-케임브리지대 출신이 수두룩한 영국 정치인-관료들 사이에서 "그의 동의가 없으면,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최고의 실세"라는 말을 듣는다./AP 연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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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보수당에서도 일부 의원들은 “당장 총리직을 사퇴하라”고 요구하고, 다른 쪽에선 “일단 내각부의 조사를 기다리자”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떠오른 인물이 조사를 담당할 내각부의 수 그레이(65) 제2차관이다. 영국인 대부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그러나 영국 정치인‧관료들은 그레이야말로 “신의 대리인(deputy God)” “영국을 움직이는 진짜 실력자”라고 말한다. 적잖은 보수‧노동당의 실세 정치인들이 그레이의 윤리 조사를 받고 내각에서 쫓겨났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이미 존슨 총리가 그레이의 대면 인터뷰를 받았다”고 전했다.

◇ “신의 대리인” “영국을 움직이는 진짜 실세” “최고 심문관(審問官‧Inquisitor-in-Chief)” 명성

수 그레이 차관은 코로나 봉쇄 기간 중 총리 관저와 내각부, 교육부 건물 등에서 열린 직원 파티에 대해, 참석자‧장소‧목적 등을 ‘신속하게’ 파악하고, 방역 지침 위반 여부를 따져서 보고서를 내게 된다. 보고서 제출 시점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영국 언론에선 수주~수개월 걸릴 것으로 전망한다.

그레이의 보고 라인은 사이먼 케이스 내각부(Cabinet Office) 장관→존슨 총리다. 그러나 케이스 장관은 내각부에서도 파티가 열린 것이 드러나면서 지휘‧보고 라인에서 빠졌다. 존슨 총리에게 보고서 채택의 최종 결정권이 있지만, ‘폭발적인’ 내용이 담기면 존슨이 이를 거부하기 힘들다.

◇ 대학 안 나온 그레이 앞에서, 옥스브리지 출신 정치인 관료들 긴장

그레이는 대학 문턱에도 안 갔지만,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해 작년 5월 현 직책에 올랐다. 이전에는 내각부의 규율‧윤리 담당 국장(2012~2018), 재무부 차관 등을 지냈다. 옥스브리지 출신이 즐비한 영국의 엘리트 정치인‧관료 사회에서 그레이의 존재는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는 최고 실력자”(올리버 레트윈 전 보수당 의원)로 통한다.

2010년 연립정부 시절 자유당 출신의 재무차관이었던 데이비드 로스는 의회에서 그레이를 “신의 대리인(deputy God)”이라고 불렀다. 그는 회고록에 “이 위대한 영국을 누가 움직이는지 파악하는데 2년 걸렸다. 바로 수 그레이라는 여성”이라고 썼다.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총리의 정책 참모였던 올리버 레트윈 의원은 “그레이가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된다. 우리 회고록도 그가 다 검열한다”고 말했다.

거스 오도넬 내각부 차관은 2017년 BBC 방송에 “만약 영국 공무원 중에 누군가 회고록을 쓴다면, 수 그레이의 것이 가장 값지고 화제를 일으킬 것이지만 수는 결코 쓰지 않고 모든 비밀을 안고 무덤으로 갈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한 바 있다.

◇실세 정치인 장‧차관 3명의 비위(非違) 밝혀 정치 생명 끝내

총리를 보좌하는 내각부는 총리를 보좌해, 부처 간 정책을 조율하고 직원들의 윤리를 감찰하고 정부개혁을 주도하는 부처다. 그레이 차관은 고위 공직자들의 행동 규범을 정하고 비위 사실을 냉혹하게 판단하는 조사관으로 ‘악명’이 높다.

내각부 국장 시절, 의원 출신 장관(secretary)과 차관(minister) 3명의 비리를 파헤쳐 사임시켰다. 그레이는 2017년 수석장관(First Secretary of State)으로서 테리사 메이 당시 총리의 강력한 맹방(盟邦)이었던 데미안 그린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을 조사하면서 “양쪽 주장이 상반되지만, 여기자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plausible)”는 보고서를 냈다. 그레이는 정치적 압력에도 “설득력이 있다”는 문구의 포함을 관철시켰다. 심지어 2008년 그린이 업무용 의원 컴퓨터로 포르노물을 본 것도 밝혀냈다. 그린은 결국 사임했다.

2012년엔 경찰관에게 “하류인생(pleb)”이라고 욕했던 당시 보수당 의원 앤드류 미첼도 그레이의 조사를 받은 뒤 정치 생명이 끝났다.

◇소셜미디어에 갑자기 ‘밈(meme)’ 소재로 떠올라

그레이는 1970년대 말 공무원이 됐다가, 한 동안 북아일랜드 뉴리에서 컨트리 가수인 남편과 함께 선술집(pub)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 내각부에 다시 합류했다.

그래서 총리실 직원들이 ‘파티’가 아니라 ‘일의 연속’ ‘정책 모임’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놓고, 영국인들은 “전직 선술집 주인이 이게 ‘술 파티’인지 아닌지 분간 못 한다면 누가 알 수 있겠느냐”고 농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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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스트로가노프(쇠고기 요리)를 먹었지?" 범인을 예단하지 않고, 그레이의 보고서가 나오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는, 그레이를 밈(meme) 소재로 한 트윗. /트위터 스크린샷


트위터에선 “내가 진짜 냉장고에서 마지막 치즈 조각을 꺼내 먹었는지, 수 그레이에게 조사를 부탁했다” “누가 쇠고기 요리를 먹었는지 예단하지 않고, 그레이의 보고서를 기다린다”는 등의 밈(meme‧유행거리)이 나돈다.

[이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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