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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미국과 ‘저농축 깐부’ 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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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국제정치학자들 중 다수는 미국과 중국 간 패권경쟁 색채가 점차 짙게 드러나는 것으로 인식한다. 나 역시 닥쳐올 미·중 격돌이 이전의 모든 격돌과 차원이 다른 격돌이 될 것 같아 두렵다.

경향신문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1980년대 초 중국은 하나의 극(極)일 수밖에 없다고 했던 덩샤오핑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지난해 11월 ‘역사 결의’로 영구집권 토대를 마련한 시진핑은 2주 전 중앙군사위원회 명령 1호에 서명하고 모든 중국군에 훈련 개시 동원령을 내렸다. 같은 날 중국 외교부는 핵무기 현대화를 계속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작년 11월 기준으로 200기 초반 핵탄두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이 미국(5550개) 수준에 질과 양적으로 빠르게 근접해야 한다는 국가방침을 세운 셈이다.

태평양 사이에서 역내 패권을 두고 벌이는 ‘제로섬’ 격랑은 오래전에 예고됐다. 여기에다 대만문제까지 빠르게 전운을 모으고 있으며, 지난 10여년간 중국과의 가상 전쟁게임에서 미국이 이긴 적이 거의 없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미국이 쿼드, 오커스 등으로 중국에 선방을 날린 게 우연은 아니었다. 미국 혼자서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 버겁다보니 다자화된 동맹 형태로 블록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미국 주도 ‘동맹의 블록화’에 동참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한·미동맹에 기반을 두는 자강(自强)으로도 족하다는 입장이다.

실제 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보다 많은 국방비를 지출하기는 했다. 국방비 증가율만 보더라도 노무현 정부(8.76%)를 제외하고, 이명박 정부(5.32%), 박근혜 정부(3.98%)보다 높은 6.5%였다. 국방비 중에서 무기구입·개발 비용을 의미하는 ‘방위력개선비’에서도 문재인 정부(7.38%)가 노무현(7.06%), 이명박(5.86%), 박근혜(4.65%) 정부보다 높았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긴밀한 방산협력이 있었음에도 불구, 문재인 정부가 미국과 중국 중 선호를 드러내지 않고 나름 ‘균형’을 갖추려 했던 노력은 고육지책으로 평가한다.

46년 전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가 연설에서 “큰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를 사냥하고 작은 물고기는 새우를 잡아먹는 세상에서 싱가포르는 독을 품은 새우가 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 함의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무정부 상태인 국제질서가 파국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독을 품은 새우임을 포식자들에게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김일성이 리콴유로부터 한 수 배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북한은 체제 생존을 위해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는 게 학계의 다수설이다.

핵무장에 대한 우리의 ‘밈’(meme)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통일연구원이 지난달에 공개한 ‘통일의식조사 2021’에 따르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남한도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에 71.3%가 찬성했다. 미국 핵무기의 남한 재배치에는 61.8%가, 남북통일 이후 핵무기 보유에는 61.6%가 찬성했다. 한국의 원자력 잠수함 개발에는 75.2%가 지지 의사를 밝혔다. 핵무기만 보유하면 ‘북핵 두통’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헛된 꿈이다. 핵무기 보유는 ‘게보린’이 아니다.

핵무기 관련 기술을 군사적으로 사용하려는 동기도, 선택도 그리고 어떠한 정책조차 결정한 적이 없는데도 워싱턴 핵비확산 정책결정자들은 한국에다 일찌감치 ‘핵 잠재국’ 주홍글씨를 새겼다. 농축 혹은 재처리를 통해 핵무기만 생산하지 않을 뿐 핵무기 개발 능력은 갖춘 국가라는 것이다. 특히 농축은 북한 비핵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국가적으로 판명나고, 한반도가 핵무장국들로 둘러싸일 때 한국이 미래에 핵무기 개발이라는 장거리 로드맵의 중간단계에서 일시적으로 ‘정차’하는 기술적 헤징전략이다. 대선 후보들은 새우처럼 굽신거리지 않고 미국과 어떻게 ‘저농축 깐부’를 할 것인가라는 우문에 현답을 내놓아야 한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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