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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사회부 기자 ‘짬빠노 형’…참척의 고통에도 꿋꿋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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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고 임판호 선배를 보내며

한겨레

1960년대초 경향신문 기자 시절 고 임판호(오른쪽)씨와 김경래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유족 제공


1959년 ‘경향신문’ 입사 사건기자 활약

영화 ‘길’ 주인공 이름과 비슷해 ‘별명’

1975년 언론사 떠난 이후에도 ‘교우’


1984년 연대생 둘째 용준군 ‘군 의문사’

89년 막내딸 수경양 ‘비밀방북’ 파란

2005년엔 외손자 불의의 ‘사고사’

말년 가톨릭 신앙으로 묵묵히 감내


“어이 짬빠노 ! 어서오게. 오늘 새 후배를 소개하지. 얼마 전 <한국일보> 기자 공채로 입사한 신입생이야, 앞으로 차근차근 지도해 주라고….” “이성춘입니다. 언론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환영해요. 나 ‘경향’의 임판호요.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거요.”

지난 연말 별세한 임판호(향년 88) 선배를 처음 만난 것은 필자가 언론계에 입문한 지 겨우 보름정도 지난 1963년 가을 어느날 저녁. 장소는 동아일보사 인근 서울 태평로소방서 뒷편의 허스름한 대폿집에서였다.

이무렵 나라의 분위기는 계속되는 가난 속에 5·16쿠데타 이후 갖가지 규제로 침체돼 있었다. 다만 이해 정초부터 정치활동이 재개되고 민정이양을 위해 10월15일 대통령 선거, 11월26일 국회의원 선거가 임박해오자 정치 사회 언론분야가 아연 활기를 띄기 시작한 것이다.

선배 기자들은 거의 매일 무교동 다동 일대의 낡고 누추한 싸구려 대폿집에 모여 주로 밀조한 약주 막걸리 막소주(카바이트)를 마셨다. 필자같은 초년병들은 뿌연 백열등 아래 대폿집마다 10여명의 기자들이 끼어앉아 이따금 고성도 지르며 뿜어대는 열띤 주장, 불만, 담론, 대화의 분위기는 사뭇 흥미롭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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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임판호씨는 1975년 언론계를 떠날 때까지 15년간 주요 신문사에서 주로 사회부 기자로 활약했다. 사진은 판문점 취재 때 모습이다. 유족 제공


이날 첫 인사한 임 선배는 키가 약간 작고 형형한 눈빛에 다부진 인상이었다 . 술은 사양하지 않고 마시지만 말수는 적었다. 그러나 어떤 사안에 대해 얘기가 시작되면 논리적으로 의견을 냈다. 그런데 서로 이름을 부르며 주장들을 펴면서 임 선배에 대해서는 ‘짬빠노’라고들 부르지 않는가. 침묵하던 필자가 “혹시 짬빠노는 이탈리아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아닌지요?”라고 입을 열었다. 순간 격론을 벌이던 선배들은 “짬빠노, 자네 정말 유명한 영화배우가 맞구먼.” “이렇게 젊은 팬이 있는 줄 몰랐어.” “오늘 술값은 자네가 내라~”라고 한마디씩 했다.

전후 이탈리아의 뛰어난 영화들 가운데 1954년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 연출한 <길>이라는 흑백 작품이 있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떠돌이 3류 차력사의 애증과 환희를 그린 내용이다. 안소니 퀸이 맡은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바로 ‘짬빠노’(참파노) 아닌가. 영화가 한국에서도 성공하면서 기자들 사이에 ‘짬빠노-임판호’ 발음이 비슷해 자연스럽게 별명이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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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23일 별세한 고 임판호씨의 순천향대서울병원 빈소. 향년 88.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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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임판호는 남도의 명문인 목포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수재다. 그는 졸업 후 고시공부를 접고 뜻한 바 있어 1959년 1월초 <경향신문> 견습2기로 언론계에 입문한다. 하지만 기자수습이 끝나기도 전인 입사 4개월 만에 큰 벽에 부딫치게 된다. 자유당정권이 이듬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부 비판에 선봉장격이였던 경향신문을 일부 칼럼 내용을 트집잡아, 시효가 지난 ‘군정명령 33호 위반’이란 억지논리로 폐간하는 폭거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날벼락으로 엄청난 충격 속에 빠진 경향신문의 기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두 가지로 처신이 갈리게 된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언론자유와 회사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버틴 것, 다른 쪽은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른 신문사 또는 다른 업종으로 전직한 것이다.

임판호는 언론탄압에 대한 불의와 불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전자를 택한다. 1년만에 4·19민주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자유당정권의 괴멸과 함께 경향신문은 복간됐다. 사회부에 배치된 임판호는 사건기자로 맹활약했지만 복간된 지 1년1개월 만에 5·16쿠데타로 민간정부가 붕괴되고 세상은 군정 치하로 바뀐다.

경향신문은 또 다시 권력의 벼락을 맞게 된다. 강제적 타의에 의해 가톨릭 재산 소유에서 민간 불하 형식으로 변신해야만 했다. 임판호는 이후 수년간 사회부의 터줏대감으로 시경캡, 법조, 내무부, 문교부, 시청 등을 출입하게 된다. 그는 1965년 가을 경향신문을 떠나 새로 창간된 <중앙일보>로 자리를 옮겼다. 1967년 6월에는 20여일동안 베트남전을 취재하기도 했다. 1972년 7월 <서울신문>으로 자리를 옮긴 임판호는 이듬해 5월부터 사회부장을 맡는다. 그러다 신문사의 사정과 본인의 결단으로 결국 1975년말 언론계를 떠나 문교부의 대변인으로 전업했다.

언론계 재직은 총 15년으로 그리 길지 않지만 그로서는 실로 값지고 귀중한 경험이었기에 결심하기까지 며칠 밤을 새우다 시피했다고 훗날 후배들에게 술회했다. 그는 20여년 문교부 대변인-서울지하절공사 공보실장과 관리이사-아리랑 티브이(TV) 상임감사를 지냈다. 이 기간동안 친정인 언론계의 각종 행사나 모임에는 자주 어울려 대포를 마시며 대화하기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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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임판호(오른쪽)씨는 1989년 8월15일 귀환한 딸 수경양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자 김수환(왼쪽) 추기경, 김영삼 대통령 등 각계 지도자를 만나 석방을 탄원했다.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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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딸 임수경(왼쪽 둘째)양이 투옥 3년 6개월 만인 1992년 12월24일 석방되어 어머니 김정은(맨 왼쪽), 아버지 임판호(맨 오른쪽)씨, 조카 등 가족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박용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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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를 떠난 이후 임판호는 개인적으로 큼직한 비극과 사건을 겪어야 했다. 첫째는 1984년 11월 연세대 3학년 재학 중에 입대한 둘째아들 용준군을 이른바 의문사로 잃은 것이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참척이었다. 두 번째는 1989년 6월 외국어대에 재학중이던 막내딸 수경양이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극비리에 방북해 전세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북한은 수경양의 활달한 행보에 내심 놀라면서도 ‘통일의 꽃’이라고 선전했다. 그해 8월15일 판문점을 거쳐 귀환한 수경양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반 복역하여 부모의 놀라움과 고통은 계속됐다. 세번째는 2005년 어린 외손자가 불의의 사고로 숨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시련으로 임판호는 말수가 적어지고 사람들 모임을 꺼리게 된다. 거센 파도처럼 꼬리를 무는 비극을 묵묵히 마음 속 깊이 인내로 꿋꿋하게 극복하면서 가톨릭 신앙에 더 열중했다.

언젠가 모처럼 언론계 후배들과 동석한 저녁자리에서 필자는 임 선배에게 “얼마나 괴로우시겠냐”고 위로했다. 잇따라 잔을 비우던 그는 “모든 게 나의 운명인가봐, 괴롭지만 견디어 내는 수밖에 없겠지…”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짬빠노 형! 하느님 나라에서 모든 무거운 짐 내려놓고 편안히 쉬십시오.

이성춘/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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