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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없는 중년의 삶, 술이 윤활유가 될까···영화 ‘어나더 라운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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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네 명의 중년 남자들이 있다. 이들의 삶엔 더 이상 윤기가 없다. 학생들은 지루한 수업을 무시하거나 이의를 제기한다. 아내나 자식과의 관계는 삐걱거린다. 겉보기엔 결정적인 불화가 없지만 아버지와 다른 가족 사이엔 감정 교류가 사라진 지 오래다. 독신인 한 남성은 병든 노견의 뒤치다꺼리에 바쁘다.

이중 한 친구가 흥미로운 논문의 가설을 들려준다. “인간에게 결핍된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주장이다. 네 남성은 자신들의 인생으로 실험에 착수하기로 한다. 일과 시간에 조금의 술을 마시되, 오후 8시 이후와 주말에는 금주한다는 원칙을 정한다. 실험 시작 이후 이들의 삶은 차츰 변한다. 적당히 들뜬 수업은 창의성이 넘치고 유쾌해진다. 가족과도 좀 더 솔직한 대화가 오간다. 말만 오갔을 뿐 차마 실행하지 못한 가족 여행도 쉽게 추진된다. 네 남자는 조금씩 알코올 농도를 올리며 실험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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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권태와 무기력에 빠진 중년 남성들이 적정량의 음주를 통해 이를 극복해보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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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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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영화 <어나더 라운드>는 인생과 술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를 연출한 토마스 빈테르베르그는 덴마크 대표 영화감독 중 하나다. 1995년 라스 폰 트리에 등과 함께 영화의 환상성·상업성을 배격하고 엄격한 사실성을 추구하자고 선언한 ‘도그마 95’를 주창한 인물이기도 하다. <어나더 라운드>를 엄격한 사실주의 영화라 보기는 어렵지만, 마치 ‘알코올 농도에 따른 인간 행동 관찰 연구’의 영상 보고서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알코올 농도 자막 이후 곧바로 그에 따른 배우들의 술 취한 연기를 보여주는 식이다. 마스 미켈센 등 배우들과 제작진은 촬영에 앞서 2주간 함께 집중적인 리허설과 음주 실험을 진행했다. 영화에 묘사되지 않은 캐릭터의 과거, 미래를 이야기했고, 실제 음주량을 조절해가며 대사나 몸동작을 실험했다.

이 영화는 감독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빈테르베르그는 딸 아이다를 극중 미켈센의 딸로 캐스팅했다. 아이다의 아이디어를 시나리오에 반영했고, 실제 아이다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촬영을 계획했다. 촬영 4일째 되던 날 아이다는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빈테르베르그는 한동안 슬픔에 빠졌다가 촬영을 재개했다. 딸이 다니던 학교에서 촬영할 때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날”이었다고 돌이키기도 했다. 빈테르베르그는 영화 말미 아이다를 기리는 자막을 넣었다. 지난해 제93회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면서도 딸에게 수상소감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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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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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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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이 지나 돌아보면 ‘도그마 95’는 조금의 패기와 많은 치기가 뒤섞인 선언이었다. 이 선언문을 썼던 감독은 어느덧 53세의 중년이 됐다. <어나더 라운드>는 중년 남성들이 술을 수단으로 권태와 무기력을 이겨나가는 실험을 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마는 이야기다. 이들의 실험이 실패한 것은 술을 ‘적당히’ 마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초 술에 의지해 인생을 바꿔볼 생각을 할 정도로 중년의 위기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인 주인공과 그들의 가족, 학생들을 차분히 관찰한다. 가끔은 주인공들에게 측은함을 내비치면서도 깊은 자기연민에 빠지지는 않는다.

영화는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예기치 않게 가족·친구와 영원히 이별하거나 직장에서 성취감을 잃거나 스스로 못난 사람임을 불현듯 깨닫는 과정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삶을 비관하거나 저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좋은 와인 한 잔을 마셨을 때처럼, 아주 가끔 불현듯 찾아오는 행복한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인생이라는 깨달음을 전한다. 기계체조와 무용을 하다가 30세에 연기를 시작한 미켈센이 마지막 장면에서 오랜만에 춤솜씨를 보여준다. 춤을 춘다고 인생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춤이라도 추니까 견딜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19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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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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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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