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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조용수 사장 등 통일운동 희생자들 ‘국가 묘지’ 모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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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조용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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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준 고문이 인터뷰를 마친 뒤 사진을 찍고 있다. “젊었을 때는 미국에 가 웨스트포인트(미국 육사)를 졸업해 별을 달겠다는 꿈도 있었죠. 하지만 <민족일보> 사건으로 지난 60년 동안 인생이 이렇게 저렇게 흘러가버렸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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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수 사장(1930~61)과 조 사장이 구명에 앞장선 조봉암 진보당 대표 등 평화통일 운동을 하다 희생당한 분들을 국가가 관리하는 공적인 묘지에 모시는 게 남은 바람입니다.”

오는 21일은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박정희 정권에게 사법살인을 당한 지 꼭 60년이다. 박 정권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흘 지난 61년 5월 19일에 조용수가 석 달 전 창간한 진보 매체 <민족일보>를 폐간하고 6개월 뒤에는 만 31살이던 조 사장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조선총련계 자금으로 신문을 만들었다고 죄를 꾸민 것이다. 2006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는 이 사건을 ‘박정희 쿠데타 군부의 간첩 조작 및 사법 살인’으로 규정했다. “쿠데타 주도 세력이 철저한 반공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미국에 보여주고 대내적으로는 쿠데타 장애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불법으로 저지른 사건 ”이라는 것이다. 2년 뒤 법원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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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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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수(오른쪽)·용준 형제의 청년 시절 모습.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제공


조용수 60주기 추모식을 21일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 장지에서 여는 사단법인 민족일보기념사업회(이사장 원희복) 고문이자 고인의 동생인 조용준(87)씨를 지난 27일 경기 하남시 자택에서 만났다. 조 고문은 <민족일보> 창간 기획실장으로 문화사업을 담당했고 90년대 이후 형의 명예회복과 추모 활동에 힘써왔다. “매년 찾는 진보단체 회원과 <민족일보> 관계자 50~60분이 모여 간략히 치르려고 해요. 15명 정도 되는 사업회 일본 지회 회원들은 코로나로 참석이 어려울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용수 형 눈치 보는 게 일이었어요. 저한테는 아주 위압적인 분이었죠. 형이 셋째, 내가 넷째 아들인데 원래 바로 위 형이 무섭잖아요. 동생 사랑으로 엄하게 대했다고 생각해요. 형이 <민족일보>를 만들며 함께하자고 해 다니던 운송회사를 그만두고 합류했죠. 문화사업은 내가 원했어요. 주변에 아는 배우들이 많았거든요. 신문사가 잘 되면 쿠바 무용수 초청공연을 하려고 했죠.”

그가 기획실 직원 1명과 함께한 ‘문화사업’에는 독립운동가 지원도 있었다. 사장의 직접 지시였단다. “장건상과 조시원 선생 등 독립운동가 12명 집에 쌀 두 가마와 연탄 100장, 정종 두 병씩 전달했죠. 회사 차 ‘쓰리쿼터’로 배달했는데 기자들이 차가 급히 필요한 데 없다고 짜증도 냈죠. 형은 우리 민족에 독립운동가가 남긴 자취가 크다면서 남북통일을 위해서라도 어려운 독립운동 유족을 도와야 한다고 했죠.”

‘민족의 진로 제시, 사회 부정과 부패 고발, 노동 대중의 권익 옹호, 조국의 통일 호소’. 61년 2월 13일 창간호를 낸 <민족일보> 4대 사시다. 신문은 창간하고 얼마 안 돼 가판 판매 부수 1위로 올라섰다. 기존 매체와 달리 평화 통일을 말하고 노동자 편을 들자 정론에 목말랐던 독자들이 호응한 것이다. “지금 남았다면 큰 언론사가 됐을 겁니다. 그때 형님은 4·19 뒤 사세가 위축된 <조선일보> 인수도 추진했어요. <조선일보> 총무국 간부를 하다 우리 신문에 스카우트된 전승택씨가 그 일을 맡았죠.”

박정희 정권에 간첩 몰려 사형당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친동생

21일 경기 광주 묘소에서 60주기


“사라진 수사 기록 꼭 찾고 싶어

형님 왜 죽었는지 아직도 몰라

박정희는 한마디로 살인마요”


신문사 사원 102명 중 기자는 80여 명이었다. 그는 “신문 머리기사를 두고 가끔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기자들이 조 사장 고집을 못 당했다”고 기억했다. “1면 제목에 ‘가자 북으로, 오자 남으로’를 쓰는 문제를 두고 일부 기자들이 대학생들의 통일운동 구호를 그대로 쓰면 독창적이지 않다고 반대했어요. 하지만 조 사장은 ‘통일운동에 네 말 내 말이 따로 있나, 좋으면 쓰는 거지’라고 밀어붙였죠.” 그는 “조 사장은 언행에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아는체하는 친구들을 논리적으로 한마디로 눌러버렸다”고도 했다. “형은 교유 관계가 좋았어요. 해태제과나 대한전선 같은 큰 회사의 사위나 장손 친구들이 많았어요. 일본 유학 중 사귄 분들이죠.”

형의 친필 유고가 있냐고 하자 그는 “형님이 옥중에서 재일동포 고 곽동의 선생에게 보낸 편지 한장뿐”이라고 했다. “옛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에서 신문사를 뒤져 다 가져갔어요. 신문사가 서울 한복판인 정동 1번지 5층 건물 세 층을 전세 내 임대보증금도 꽤 됐고 차 3대와 비싼 카메라도 있었는데 다 강탈당했죠.” 그는 중정이 몰수한 재산 목록을 확인하려고 오랜 세월 추적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수사 기록이 어디에도 없어요. 판결문만 있죠. 재심 무죄로 국가에서 받은 손해배상은 이자가 붙은 형님 목숨값일 뿐입니다.” 그는 “부친이 부산 서면의 대지 50여 평 단독주택을 판 돈을 61년 5월에 신문사 운영 자금에 보태라고 형에게 보냈는데 통장도 사라져 확인할 길이 없다”고도 했다.

박 정권은 쿠데타 이틀 뒤 조 사장 등 <민족일보> 인사 10여 명을 체포했다. “나는 그때 부산으로 피했죠. 잡혔다면 감옥에 5년은 있었겠죠. 두세달 뒤 지명수배가 해제됐다는 소식을 듣고 형님 면회를 다녔어요.” 사형 집행 다음 날 형 주검을 인도받아 망우리 묘역에 묻은 이도 그였다. “오후 6시쯤 이모와 함께 망우리에 도착해 작업이 새벽에야 끝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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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12월 경기 남한산성에 있는 조용수 사장 묘소에서 유족과 기념사업회(이사장 원희복) 관계자들이 58주기 추도식을 마치고 사진을 찍고 있다.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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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6일 민족일보 조용수언론상 시상식에서 김삼웅 전 <서울신문> 주필(가운데)이 수상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오른쪽은 고승우 심시위원장이다.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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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정국에서 우익 학생 활동도 했던 조용수는 1951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 정경학부에 편입했다. 형이 통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일본 유학 중 일본인들에게 천대받고 학대당하는 동포들을 보면서 민족의 비애를 느꼈을 겁니다. 일본에서 돈을 만지는 동포들도 대개 고물상이나 부동산업을 해요. 그런 현실을 보고 우리 민족이 이렇게 살아야 하겠느냐는 절박한 심정이었겠죠. 형님이 일본에서 주도적으로 이끈 한국 유학생 모임 ‘한학동맹’도 민족애를 키우는 데 영향이 있었죠.” 그는 “형님은 미국과 소련 강대국 등쌀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통일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했다”고도 했다.

간첩으로 몰린 형의 죽음 이후 삶에 대해 궁금해하자 그는 한국 브리태니커를 설립한 고 한창기(월간 <뿌리깊은 나무> 발행인) 사장의 도움을 받은 이야기를 꺼냈다. “한 사장이 내 처의 사촌 동생과 친해요. 내가 한국브리태니카 영업사원으로 들어가고 얼마 안 돼 나를 부산지사 총무과장을 시키더군요.”

<민족일보> 시절 기억나는 형님 모습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양반 머리에는 남북이 하루빨리 손잡고 통일해야 한다는 일념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형님은 왜 죽었나요?’라고 묻자 그는 “나도 모르죠. 박정희는 한마디로 살인마요”라고 받았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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