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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조동연과 두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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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읽기] 손아람 | 작가

학창 시절, 자기 형제를 ‘뻐꾸기’라고 부르던 녀석이 있었다. 그의 형제는 아버지가 남긴 혼외자였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은 뒤 경제적 지원이 끊기자 생모는 양육권을 포기했고, 오갈 데 없는 아이를 그의 어머니가 거뒀다. 그의 어머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을뿐더러 사회 통념상으로는 원수의 새끼나 다름없는 자식을 결국 대학까지 보냈다. 나는 아직도 그 어머니의 마음속을 헤아릴 수 없다.

‘배다른 자식’은 흔하지만 ‘씨다른 자식’이란 말은 쓰이지 않는다. 이부형제가 이복형제에 비해 극히 드물어서다. 양육 의무의 불평등한 귀속과 관련이 있다. 생부의 부양 의사가 있다면 계모의 역할을 받아들여 양육 의무를 다하는 여성들과 달리, 혈육 아닌 자를 자식으로 받아들여 양육하려는 남성은 거의 없다. 이것은 사실 부계 사회의 정의에 가깝다. 이부형제 가족은 배우자 양쪽에 모두 부양 자녀가 있어 일종의 양육 품앗이가 성립하거나, 생모가 양육과 경제적 부양을 홀로 떠안을 때 주로 가능하다. 생부가 부양을 거부했을 때, 이 외로운 책임을 감당할 수 없는 여성들은 때로 아이를 버리는 선택을 한다. 그래서 영아 유기로 지탄받는 사람은 늘 여성이다. 낙태로 지탄받는 사람도 여성이고, 영아 살해로 지탄받는 사람도 여성이다. 남성은 천인공노할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혼외자를 둔 남성이 두 집 살림을 꾸리는 사실상의 일부다처제는 지금도 존재하지만, 사회는 그 반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런 경우 생부조차 양육 의무의 수행을 거부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혼외자를 보호하려는 여성들이 배우자를 속인다. 부성불확실성의 문제는 부계 사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양육 자원을 여성이 갖는 모계 사회에서는 부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교문화 연구에 따르면, 여러 부계 문화권에서 갓난아이의 외양을 묘사할 때 ‘아버지를 닮았다’는 표현이 ‘어머니를 닮았다’는 표현보다 압도적으로 빈번하게 관찰된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이를 부성불확실성을 해소하여 아버지에게 부양 책임을 이끌어내기 위한 관습으로 해석한다.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입에 발린 거짓말을 늘어놓는 배우자에게 속아왔는지를 떠올리며 분개하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보라. 이런 일은 애초에 친자식에게 양육 의무를 다하지 않는 생부가 없다면 아예 일어나지도 않는다.

조동연 더불어민주당 공동상임선대위원장이 혼외자 논란으로 자진 사퇴했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사퇴를 결심하는 순간까지, 그의 삶에서 우선순위는 분명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사건에서 성폭력 여부보다 중요한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왜 혼외자는 아버지가 기르지 않고 어머니가 길러야 하는가? 왜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아이를 버려선 안 되는가? 아버지는 혼외자 부양 의무를 저버리고 아이를 짐짝처럼 어머니에게 떠넘겨도 되는 것인가? 조동연이 사회적 지탄을 받는 동안, 책임도 비난도 모두 피해 달아난 생부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조동연에게 혼외자의 책임이 있다면, 생부는 그 이상으로 사회적 파면을 당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왜 사람들은 성폭력의 경우에만 생부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까?

조동연의 혼외자 의혹을 폭로한 유튜버들은 아예 ‘조동연 시리즈’를 예고하고 나섰다. 이 끝을 모르는 호기심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고드는 방향으로는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 친자확인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혼외자의 존재를 부정했고 그 뒤로도 경력이 멀쩡했던 유력 정치인들을 생각해보라. 당장 이번 대선 후보들의 혼외자들이 세상에 나타나도 지지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대중은 속였을지언정 배우자를 속이지는 않았으니까.” 날카로운 지적이다. 유력 남성들은 배우자를 속이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대신 자식을 생모에게 던져놓고 사라진다. 어떤 이가 조동연에게 그랬듯이.

조동연을 손가락질하는 남성 가운데 필리핀의 흔한 ‘코피노’ 자식을 둔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 그 아이들의 어머니는 필리핀 사회에서 또 어떤 역경을 겪고 있을지 상상하다 보면 세상에 환멸이 느껴질 지경이다. 아버지가 자기 자식이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과, 어머니가 자식을 살리기 위해 배우자와 사회 전체를 속이는 사기극을 벌여야 하는 세상. 그 두 세상이 같은 세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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