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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목에 선 굵은 힘줄로 새 시즌 향한 절실함 호소한 백전노장[김배중 기자의 핫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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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싸러 간 날도 (평소에 하던 대로) 러닝하고 웨이트하고 공 던지고 나왔어요.”

온 몸을 다 쓰는 역동적인 투구로 팬들에게 많은 볼거리와 임팩트를 남겨온 고효준(38)은 차디 찬 겨울을 보내는 중이다. 지난달 11일 LG가 발표한 미계약자 대상에 그의 이름이 오르며 ‘무적신분’이 됐기 때문이다. 발표 전 핸드폰에 뜬 운영팀장의 전화번호를 보고 이별을 직감했고 ‘함께 하지 못하게 돼 아쉽다’는 말을 들었다는 그는 “구단의 상황은 충분히 이해했다. (방출이) 처음 겪는 일도 아니고 스스로 은퇴한다는 생각은 안 했으니, 이천 (2군)캠프에서 짐을 빼던 날도 내년을 생각하면서 그날 하기로 마음먹은 훈련을 했던 거다”라고 설명했다.

서른 중반을 넘기고 최근 수년 동안 고효준의 겨울은 쉽지 않았다. 2019시즌이 끝나고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었던 당시에는 원 소속구단이던 롯데와의 협상이 장기전이 돼 이듬해 스프링캠프가 시작된 뒤에야 계약하며 약 4개월을 소속 없이 지냈다. 이듬해에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각 구단들이 선수단 규모를 줄이며 방출통보를 받았다. 다시 소속 없이 새 시즌을 준비했고 약 100일 만에 새 팀(LG)을 찾았다. 이번까지 세 번 연속 소속 없이 비 시즌에 들어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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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시즌을 맞아 개인 훈련 중인 야구선수 고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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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이라는 울타리 밖은 정형화된 틀이 없는 ‘야생’이다. 2년 전 처음 겪어본 ‘나 홀로 비 시즌’에는 캐치볼 할 상대를 못 찾아 벽에 공을 던지고 튕긴 공을 받는 일명 ‘벽치기’를 해봤단다. 눈이 예상보다 많이 와 소복이 쌓인 어느 날, 답답해진 속마음을 긍정적으로 풀어보려 쌓인 눈을 야구공 크기로 20개를 뭉쳐 어린시절 눈싸움하듯 던지며 워밍업도 했다. 올해 초에는 저연차 선수들을 위해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가 제주 서귀포 강창학야구장에 마련한 훈련캠프에 양해를 구하고 찾아가 몸을 만들기도 했다.

LG 훈련장을 나온 뒤 최근 3주 동안도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안의 헬스장, 지하주차장을 하루도 빠짐없이 오가며 웨이트, 러닝으로 몸을 만들었다. 고효준은 “매일, 매 순간이 절실했기 때문에 장소, 환경 안 따지고 훈련을 해온 거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훈련만큼은 거르지 않고 한다는 마음으로 산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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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째 힘든 겨울을 나며 조금 더 슬기롭게 비 시즌을 나는 방법도 체득했다. 3주 간의 ‘홀로 훈련’을 마치고 이번 주 초부터 좀 더 전문적으로 몸을 다지고 있다. SK(현 SSG) 트레이닝 코치 및 남자 농구대표팀 수석 트레이너 출신인 조승무 대표가 운영하고 있는 슬림앤스트롱에서다. 세계 최초 부자 타격왕에 오른 이정후(키움)도 ‘2022시즌 업그레이드’를 위해 이곳에서 몸을 만들고 있다.

7일 오전에도 고효준은 조 대표의 코칭 아래 공을 던질 때 필요한 상·하체 모든 근육, 관절을 사정없이 자극받고 있었다. 힘든 동작들로 표정이 일그러져가던 고효준에게 조 대표는 “조금만 더 하면 150km도 던지겠다”며 그의 야구를 향한 절실한 마음까지 자극했다. 고효준도 숨을 고르고 다시 이를 악물었다. 8일부터는 배재고에서 고교 야구부 선수들과 필드 훈련을 시작하는 등 비 시즌 일정이 예전보다 촘촘해졌다. 다음달 중순에는 올해 초 문을 두드렸던 강창학야구장으로 향한다. 고효준은 “지금 당장이라도 테스트를 보자고 연락이 온다면 보여줘야 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즌 때와 비교하면 (몸 상태가) 90%다.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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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도 고효준은 “언제든 준비가 돼 있다”라는 의미에서 ‘90%’를 언급했고 그 상태를 유지했다. 약 두 달 뒤인 올해 2월, 당시 전력상 왼손 투수가 부족했던 LG로부터 테스트 제안을 받았고 성실하게 다져온 몸으로 당시 시속 142km의 공을 던지며 합격점을 받았다.

당시 베테랑 최저연봉(5000만 원)에 계약을 맺은 것으로 발표됐다. 하지만 LG는 고효준에게 한국시리즈(KS) 진출 등 명목으로 추가 5000만원 옵션을 추가한 총액 1억 원짜리 계약서를 내밀었다. ‘2021시즌 KS 우승’이 목표였던 LG가 그간 성실하게 몸을 잘 만든 데다 SK, KIA시절 KS 경험을 풍부하게 쌓은 베테랑을 가을무대에서 전력으로 활용하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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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유니폼을 입고 뛰던 2021시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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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의 계획도 틀어졌고, LG 유니폼을 입은 고효준의 2021년도 여러모로 틀어졌다. 그의 입단 당시만 해도 진해수(35) 외에 물음표였던 왼손 불펜 자원은 김대유(30), 최성훈(32), 김윤식(21) 등이 시즌 초반부터 호투하며 느낌표로 바뀌었다. 고효준으로서는 ‘치고 들어갈’ 틈이 좁아진 셈이다. 2군에서 시즌 후반까지 컨디션 조절을 하다 10월 1군 무대에 처음 올라 첫 2경기에서 각각 1이닝 무실점으로 기대에 부응하기 시작했지만 3번째 등판에서 수비도중 공을 던지는 왼손가락에 부상을 당해 강판됐고, 그게 올해 1군에서의 마지막이 됐다.

3경기 2와 3분의 1이닝 평균자책점 3.86. 불과 2년 전 10구단 불펜투수 중 가장 많은 경기(75경기)에 등판했지만 끄떡없던 철완에게는 허망한 성적표였다. 고효준도 “‘사고’로 나의 시즌이 끝나버린 거다. 준비가 돼 있던 부분들이 있는데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 마음이 무겁다”며 부상 순간을 아쉬워했다.

프로야구 통계사이트 스탯티즈에 따르면 올해 고효준의 평균구속(1군 기준)은 패스트볼 143.3km, 슬라이더 132.5km, 커브 124km, 스플리터 127km다. 쌩쌩했던 2019시즌(144.1km-131.7km-124.7km-128.3km)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상당한 순간 투구를 그쳤다면 수치는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부상을 당했던 10월 20일 패스트볼 평균구속은 142.3km였는데, 등판 후 첫 공에 안타를 맞은 뒤 수비도중 부상을 당했고, 이후 한 타자를 더 상대하며 7구를 더 던져 ‘평균’구속이 떨어졌다. 1군 첫 등판 날(10월 17일 패스트볼 평균 143.1km)보다 두 번째 등판 날(19일·144km) 구속이 오르는 등 실전에서 그간 준비해온 것들을 하나둘씩 보여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오래 준비하며 본 궤도에 오르려던 순간 당한 작은 부상이 한해 농사를 망치는 원흉이 됐다.

현역 연장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고효준은 “마운드 위라면, 어떤 보직이든 상황이든 가리지 않고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2002년 데뷔해 올해로 20년째 프로생활을 한 고효준의 야구가 사실 그랬다. 선발, 중간, 마무리 안 가리고 쉽지 않은 상황도 마다않고 공을 던졌다. 정규리그 통산 성적은 457경기 40승 52패 31홀드 4세이브 평균자책점 5.32로 드러나는 숫자는 평범했다. 하지만 소위 ‘스탯’에 개의치 않고 항상 근성 있는 모습으로 마운드를 지켰다. 그런 모습들이 현장에서 늘 높이 평가받았다. 선수들에게는 꿈의 무대로 꼽히는 KS 마운드를 세 시즌(2009, 2011, 2017년) 경험한 이유기도 하다. 그만큼 필요한 존재였다.

고효준은 “야구하는 게 행복했고, 김성근 감독님 등 좋은 지도자들을 만나 매 순간 절실한 마음으로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오르다보니 프로 생활도 오래 하게 된 것 같다. 나이로는 노장인 게 맞다. 하지만 몸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 올해도 패스트볼 최고 구속은 147km였다. 실력도 더 보여주고 싶고 그간 쌓은 다양한 경험들을 동생들과 현역 유니폼을 입고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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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함을 담은 인터뷰를 하기에 앞서 고효준은 약 1시간 동안 퍼스널트레이닝(PT)을 진행 중이었다. 개인의 일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PT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지켜봤다. 일그러진 표정, 새빨개진 얼굴뿐 아니라 목에 선 굵은 힘줄, 터질 듯 성이 나있는 넙다리곧은근 등이 그의 야구를 향한 절실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여전히 건강한 그가 팀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새 시즌을 준비할 수 있길 기대한다.

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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